문명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손으로 쓰는 글씨는 점차 사라지고
전자기기로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빠르고 편리하며 보관하기 용이한 장점.
이제 글씨를 業으로 삼지 않는 한, 예쁘게 쓸 필요가 없다.
대신 컴퓨터가 다 해준다.
그 옛날에는 글씨를 예쁘게 쓸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뭔가 달라 보였고 대접 받았는데 말이다.
군대에 가서도 글씨를 예쁘게 쓸 수 있다는 능력 하나만으로
많은 교육과 훈련으로부터 열외가 되었고
결국 행정병으로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행정병이 꿀 보직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계속되는 철야 작업, 수면 부족에 시달려
그리 권하고 싶은 보직은 아니었다.
원래 난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했다.
못 쓰는 정도가 아니라 惡筆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왼손잡이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태어났으면 그대로 두면 좋았을 것을.
옛날 어른들은,
왼손잡이를 무슨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신 것 같았다.
특히 숟가락질이나 글씨를 왼손으로 썼다가는 벼락이 떨어졌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 왼손으로 밥을 먹고 글씨를 썼다.
이후 어머니로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았고
적어도 이 두 가지만은 오른손잡이로 전향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봐도 엄청 힘들었다.
아홉 살짜리가 손을 바꿔 쓴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눌러 썼던지 공책이 찢어지고 연필심이 부러지고...
아예 글씨가 쓰는 일 자체가 꺼려지기도 했다.
글씨를 제대로 쓰는데 많은 에너지를 집중해서
예쁜 글씨는 엄두도 못 내고,
겨우 알아볼 수준으로만 학생 시절을 보냈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친구를 보면 부럽기는 했지만
언감생심 나와는 상관없는 분야로 여겨버렸다.
글씨를 배울 때 힘들었던 기억이 글씨와 거리를 두게 한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가 글씨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생겼다.
휴학계를 내고 입대를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마땅히 할 게 없었다.
그냥 멍하니 지낼 수가 없어서 알아 본 결과,
글씨 학원이 제일 저렴했고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학원을 다녔고, 부지런히 배우고 연습을 해서
펜글씨 분야에서만은 약간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글씨를 예쁘게 쓴다는 것.
2000년대 이전까지는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문서를 대신 작성해 주는
代書所(대서소)가 성업을 했을 정도였으니
나 역시 어디 가서나 귀한 몸이 되었다.
스물 셋까지 대단한 악필이었던 내가
스물 셋 이후 남들이 달리 보는 명필이 되었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었다.
또 다시 세상이 변해서 예쁜 글씨가 필요 없는 세상.
이런 세상이 오다니.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