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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의 땅, 안양, 안산 시절

by 신화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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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만난 시장은 안양, 안산이었다.

구의동 본사를 떠나 입사 이래 처음으로 지방인 안양 지사로 전근을 간 것이다.

물어보지 않아도 발령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는 개척 능력을 인정하고 또 다른 미개척지를 맡긴 것이다.

인정은 좋은 것이었지만 그리 달갑진 않았다.

고생은 싫었다.

숨 돌릴 틈 없는 긴장 또 긴장.


‘이번엔 또 무슨 문제가 있으려나’ 하는 불안이 앞섰다.


그 사이에 첫 진급을 했다.

‘주임’

사원 다음은 주임이다.

입사 2년 만에 처음으로 경험한 진급이었다.

이등병이 일병이 되었을 뿐인데 별을 단 기분이었다.


‘이제 주니어가 아니다. 시니어가 되었다. 뭐든 몫을 해야 한다.’


뿌듯함과 동시에 어깨도 무거웠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좋아하고 부담스러워하고 그랬던 것 같다.

시장가서 가방도 새로 사고 새 명함도 신청하고 거울 보고 으쓱으쓱해보고

혼잣말로, "안녕하세요! 00 제약 권주임입니다!" 해 보기도 했다.

혼자 회사를 다 짊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


‘주임이라...’

1989년 당시,

개업처는, 안양 100군데, 안산 50군데. 강남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며칠 만에 다 돌아볼 만큼 시장은 작았다.

안양의 평촌 신도시는 한창 개발 중, 안산은 그냥 시골 동네였다.


‘어? 팔 곳이 없네?’ 막막했다.


안산은 수인 산업도로를 끼고 있어서 정형외과가 호황이었고 안양은 공장 지역이라 이비인후과가 잘 되었다.

결국, 안양, 안산에서는 대형 거래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잘 해왔던 신규 많이 하는 특기가 하루아침에 쓸모없어졌다.

‘주임’ 체면에 징징거리며 다닐 수도 없고 그냥 끙끙 앓기만 했다.


강펀치, 한방능력이 필요했다.

강남에서 100건으로 마감했다면 안양, 안산에서는 20건 마감하기도 힘들었으니 말이다.

온종일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영업 방식에서 목을 지키며 물소를 노리는 사자가 되어야 했다.

쉽지 않았다.

이미 경쟁사가 차지하고 앉아 있는 대형 거래처를 무슨 재주로 뚫어낸단 말인가.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저 자꾸 방문하는 수밖에 없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먼저 경험한 동업자에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이 물어보고 현장에서 다른 사람보다 장시간 보내면서 방법 찾기에 골몰했다.


시골(당시 안양 안산은 시골이었다. 특히 안산은)은 情의 사회다.

진심을 전하기 쉽다.

진심만 잘 전해지면 조건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좋은 이미지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오지, 벽지가 많은 만큼 자주 방문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원장님도 계셨고,

새로운 정보에도 늘 관심이 많으셨다.


개념을 바꾸었다.


‘난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거래처에서 회사로 파견 보내놓은 파견 직원이다.’


마음속으로만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원장님들께도 그렇게 말씀드리고 증명해 보여드렸다.

서울 사람들보다 순수했던 만큼 믿어주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짧았다.


‘아~ 이분들과는 오래갈 것 같다.’


짧은 2년이었지만 정이 듬뿍 들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안양, 안산에서도 대성공이었다.


더 주문 못 해서 안달하는 분들 같았다.

나는 안양 안산에서 평생 써먹을 또 다른 영업 스킬을 ‘하나 더’ 장착하게 되었다.


진짜 영업은 가족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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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서는 안양, 안산에서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안양에서 결혼도 했고 아이도 연달아 둘이나 낳았으니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동네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만큼 기대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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