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에서 첫 진급을 하고 결혼도 했다.
스물아홉에 가장이 된 것이다.
일을 잘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영업 환경이 녹록치는 않았지만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내게는 두 번의 성공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혼집은 사무실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영업하느라 걸어 다니는 게 몸에 밴 나는 버스를 타기보다 걸어서 출퇴근하기를 즐겼다.
간혹 퇴근길에 아내를 불러내 외식을 하거나 장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온종일 이만보도 넘게 걷는데 까짓 세 정거장쯤이야.
퇴근길 중간에 KSS이비인후과가 있었다.
환자가 엄청나게 많은 거래처였다.
낮 시간에 가면 환자 대기실을 넘어 계단까지 줄을 서 있었고, 심지어 원장님 책상 위에도 어린이 환자가 수 명 올라 있을 정도였다.
이비인후과 특성상 원장님은 종일 서서 진료를 봐야 하니 면담은 고사하고 눈 마주칠 기회도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거래를 늘릴 기회는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하루는 퇴근길에 한번 들어가 봤다.
일곱 시 조금 넘긴 시간, 진료가 끝난 것 같아서.
역시 병원은 끝나 있었고 원장님은 보이지 않았다.
“원장님, 어디 계세요?”
“저기 뒤쪽에 계세요.”
“들어와!”
진료실 뒤에 숨겨진 방이 하나 있었다.
진료가 끝난 원장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머리카락은 산발을 하고 와이셔츠 단추는 다 풀어지고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벗고 축 늘어져 계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백 명 환자를 혼자 본다니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눈앞의 모습은 상상을 넘어섰다.
“왜?”
“약 이야기 드리려고요.”
“해봐”
“주절주절”
“이것, 이것, 너 보내고 싶은 만큼 보내 봐!”
의외로 일은 간단명료하게 끝났다.
그렇게 나오려는 찰라,
“시간 있어?”
“네!”
“포장마차 가서 소주 한잔 하자!”
“네!”
큰 소리로 대답은 했지만 불안했다.
‘말로는 포장마차라지만 명색이 의사인데 혹시라도 비싼 데 가면 어쩌지?’
그런데 진짜로 안양 중앙 시장 안에 있는 포장마차를 가시는 거다.
안도했다.
이 정도는 걱정 없다 싶었다.
제약 회사 담당자가 밤중에 찾아 온 것은 처음이란다.
진료 보시느라 친구도 다 끊어지고 술 먹을 사람도 없단다.
늘 진료 끝나고 소주 반병 정도가 간절했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그리웠단다.
진짜로 소주 한 병 시켜서 닭발을 안주로 해서 나눠 먹고 당신 돈으로 계산하고 깔끔하게 바이바이 하셨다.
그날 밤, 나는 복권이 당첨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마음대로 보내라고 그랬으니까 보통 이비인후과에서 5개월 정도 쓸 양을 보냈다.
‘너무 많이 왔다고 경을 치시면 어떡하지? 에이 마음대로 보내라 하셨으니까.’
큰 오산이었다. 보름도 지나지 않아 재 주문이 나왔다.
다른 의원의 열 배를 소비한다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제가 원장님을 너무 작게 봤네요.’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했다.
저녁 일곱 시 넘어서, 가끔 나도 계산하고.
거래를 떠나 나는 큰 형님 한 분을 얻었다.
“엄마! 나 낳기 전에 잃어버린 형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