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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첫 인센티브 트립(Incentive Trip)

by 신화창조
원산대반점.jpg

제약회사 영업부 직원에게 인센티브 트립은 훈장과 같았다.

인센티브로 해외를 몇 번 다녀왔느냐가 곧 능력의 척도로 인식되었고,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여행이 즐거웠고, 그렇지 않았던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한 번이라도 더 가는 것이 중요했다.

훈장과 같은 여행,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200만원 인센티브 줄까, 100만원 어치 해외여행 갈래?”

누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주저 없이 여행을 택할 정도였다.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80년대엔 주로 국내여행을 보냈다.

제주도, 강원도, 부곡하와이.

그러니 해외여행을 다녀온다는 것은 굉장한 파격이었다.


1990년 봄, 생애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영업 3년 만에 커다란 훈장을 받은 것이다.


비행기도 신혼여행으로 제주행 국내선을 타본 적은 있지만,

국제선은 처음이었다.

그때 해외로 나가는 항공사는 대한항공이 유일했다.

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공항에서 서약서를 써야 했고,

예비군 출국 신고도 따로 해야 했다.

그래도 전혀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창문을 닫아야 했다.

공항 전경이 완전히 사라진 뒤,

승무원의 안내가 있어야 비로소 창문을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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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첫 해외여행지는 대만이었다.

그 시절 대만과는 비교적 좋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항공편도 매우 많았다.

그러던 것이 1992년 여름,

대륙과 정식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대만과 관계가 악화되어 직항로가 싹 사라져버렸다.

한중수교 직전에 대만을 다녀온 것이다.

수교 한참 전이었지만 이미 대만 쪽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이른바 반한 감정이 팽배해 있었다.


‘우리 장개석 총통이 너희의 독립을 그렇게 도와줬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충분히 이해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행을 즐기고 돌아왔다.


영업을 하면서 고객을 대하면서 특히 명심해야하는 것이,

정치, 종교에 대해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화제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필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나중에 하기로 하자.

정치 이야기 금지....


첫 해외 나들이였던 대만여행은 그 이후 여러 여행지에 비해 대단한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첫 경험이 그렇듯 느끼는 기분만큼은 유달랐다.

처음 먹은 기내식, 처음 지내는 외국 호텔, 또 현지 음식 등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열심히 일해서 폼 나게 또 나오고 싶었다.

시시콜콜 모든 경험을 다 이야기하고 싶을 만큼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마음에 가슴이 뛴다.


이 맛에 영업을 한다.

김포공항.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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