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산부인과는 인기과였다.
나를 포함한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2세를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도시 지역엔 거의 한 골목 당 하나씩 존재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아도 안 되는 의원이 없었다.
또한, 다른 전공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자 원장님 비율이 높았다.
환자들이 여성 원장님을 선호하니까 말이다.
비뇨기과에 남자 원장님이 많은 것과 같은 이유로.
일반적으로 제약회사 담당자로서 산부인과는 그리 선호하는 과목이 아니다.
타과보다 진료시간이 길고, 어렵게 면담이 이루어져도 짧은 시간 내에 끝내야 했다.
심지어 분만 등 수술 일정도 많아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면담을 기다리느라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수많은 여성 틈에 끼어 앉아 있어야 한다.
양복 입은 새파란 청년이 여성들 틈에 끼어서 장시간 기다린다는 건, 그 자체로 고역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 어렵게 만나서 짧게 대화하고 나와야 하니 보통의 능력으로는 성과를 끌어내기도 무척 어렵다.
여러 이유로 우리 필드맨의 기피 대상 전공과이기도 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긴 기다림, 짧은 면담, 청일점 대기자의 쑥스러움, 이런 걸 견뎌내야 한다.
산부인과는 쓰는 약의 종류도 적다.
가장 많은 종류를 쓰는 내과의 10분의 1 수준이다.
어떻게 파고들어야 결과를 낼 수 있을까.
매일 많은 거래처를 방문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곤혹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다.
시간과 싸움도 우리에겐 매우 중요하니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자.
제약사 직원들이 잘 안 간다?
이건 기회가 아닌가.
‘그래, 그렇단 말이지...’
생각해보면 시간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다.
원장님도 점심은 드신다.
출근할 때부터 환자 손 잡고 오는 분은 없다.
퇴근도 하신다.
노는 날도 있다.
그런 시간을 찾아내면 되잖아?
생각이 여기쯤 이르자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물론 겨우 짬을 내 쉬려고 하는 피곤한 원장님을 방해할 수는 없다.
서투르게 접근했다간 이미지만 망치고 쫓겨난다.
잘못하다간 블랙리스트에 올라 병원 출입도 못 할 수 있다.
자알~해야 한다.
비록 쓰는 약 종류는 적지만 쓰는 양은 장난이 아니다.
특히 산모 회복용 영양 수액제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므로 힘들어도 꼭 가야 했다.
출근길에 우연한 마주침을 가장해서 안면부터 트고,
원장님 점심 단골 식당에서 진을 치고,
화젯거리를 만들어 진료가 끝날 때를 기다린다.
전달할 내용은 핵심만 추려 간결하게 만들어 놔야 한다.
아주 짧게 지나가는 관심의 순간을 절대 놓치면 안 된다.
(구매 동기가 일어나는 아주 짧은 순간을 파고들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전공과지만,
한번 거래를 열어놓으면 큰 변수가 없는 한, 끊어지지 않고 오래 간다.
경쟁사가 잘 오니까.
나는 산부인과 거래를 많이 했다.
밤으로, 새벽으로, 점심밥 안 먹고 쫓아다닌 덕분에 말이다.
그랬던 과가 요즘은 기피 과가 되어서,
선생님들이 전공도 안 하려 하고,
개업처도 왕창 줄어서 분만 환자가 거리를 헤맨다고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얼마 전에 어느 친한 원장님 뵈러 병원을 방문했는데
분만 환자가 없어서 미용, 비만 관리로 병원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했다.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원장님의 형편도 비슷하단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해가 뜨고 똑같이 지는데 왜 이리 다를까 모르겠다.
인구 폭발을 염려했던 우리가 지금은 인구 소멸을 걱정한다.
이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