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줌마 원장님 평생 의리

by 신화창조
민들레.jpg

1990년 어느 날 안양 사무실 인근,

준종합병원 내과 과장님께서 개업을 준비하시고 계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초면이다. 큰누나뻘, 멋진 여자 선생님이었다.

사실 여자 선생님은 조금 어렵다. 사람 보는 눈이 신중하고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만큼 새로 사귀기 힘들다.

그래서 큰 욕심을 부리면 실망하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신용을 쌓게 되면 잘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남자 선생님 대할 때보다 긴 호흡을 각오해야 한다.

계속 투자하다 보면 언젠간 반드시 보답이 돌아온다는 말이다.


선생님을 만나 보니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개업 상식도 없고 장소마저 정해 놓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놓고 덜렁 퇴직 날짜를 정하고 언제까지 개업할 테니 도와 달라고 하신다.


개업을 하려면 자금, 장소, 경영 상식 순으로 준비가 필요하다.

대부분 자금은 있다.

돈이 있어야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으니까.

다음은 장소다. 이게 가장 힘들다.

환자가 모이는 목이 좋은 곳은 이미 남들이 차지하고 있고,

아차 잘못하면 망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이나 주위 동료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원장님과 그들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업자는 수수료가 목적이고, 동료는 라이벌인 데다가 자기 병원 중심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실패 확률이 높다.

사실 개업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서 망하면 아무리 의사 선생님이라도 회복하기 힘들다.


부담스러운 부탁이었다.

우리 제약사 필드맨의 눈은 이런 면에서 정확하다.

많이 보고 다녔으므로 어디가 잘되고 어디가 파리를 날릴 곳인지 잘 안다.

게다가 선생님과 목표도 일치한다.

병원이 잘 돼야 약도 많이 쓸 게 아닌가.


장소부터 알아봐 달란다.

우선 안양 지역부터 샅샅이 뒤졌다.

생각보다 없다.

준수해 보이는 곳이라고 판단해 알려드리면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고,

선생님이 마음에 드는 곳은 내 눈에 안 찬다.

선생님의 퇴직 날짜는 다가오고 점점 초조해졌다.

찾다가 찾다가 안양 지역을 넘어 구로로 나가버렸다.


사실 내 입장에서 구로로 정해지면 내 지역이 아니어서 담당할 수도 없다.

남 좋은 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최적의 장소라면 앞뒤 가리지 말아야지.


찾았다!


너무 도심도 아니고 골목 안도 아닌,

재래시장을 낀 사거리 2층 건물의 빈 상가를 찾아 원장님을 모시고 갔는데 만족해하셨다.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이 되었다.

제날짜에 개업을 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상식적인 것, 직원 모집까지 도와드렸기 때문에 잘 정착하신 것이다.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혹시 내 눈이 잘 못 되어 파리라도 날리면?

다행히 예상대로 환자는 개업 첫 날부터 미어터졌다.

거기에는 원장님의 친절한 성품도 한몫했다.

아무리 목이 좋은 자리라도 원장님이 뻣뻣하면 파리를 날린다는 게 개원가의 불문율이다.

오히려 원장님이 너무 친절한 동네 아줌마같아서 진료실을 동네 사랑방으로 만드신 통에,

진료 시간이 너무 길어져 초대박은 못 터트렸을 정도였다.

다행이었다.

병원이 구로로 가는 통에 정작 난 실적을 하나도 못 올리고 사랑하는(?) 후배만 도와주게 된 꼴이 되었지만,

실적 못지 않게 보람있었다. 사람을 얻었잖는가.


이런 사실이 미안하셨던 원장님은 많은 지인, 친구를 내게 소개해 주셨다.

먼 훗날, 내가 관리자가 되고 원장님도 지역 의사회를 이끌어 가는 신분이 되었을 때,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신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서로 안부하며 지낸다.

의리.jpg


keyword
이전 05화산부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