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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범어동

by 신화창조
풍뎅이.jpg

대구시 수성구에는 범어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서울로 치면 강남과 비견될 만큼 잘 사는 동네이고 세련된 거리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1969년 범어동은 전기조차 안 들어오는 가난한 시골 동네였다.


아홉 살, 어린 나이, 우리 가족은 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도 몰랐고 궁금하지도 않다.

당시 삼십대이셨던 부모님께서 힘든 결정을 하셨다.

그저 어른들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아마도... 힘드셨겠지. 공무원 박봉에 여섯 식구를 부양해야 하셨으니.

이사와 동시에 전학을 갔고 그 곳에서 만 1년을 살았다.


전기가 없는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롱불에 의지하던 봉화 할머니 댁에 비해,

기름 넣는 초롱불 밑에서 생활하니 우리가 더 부자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범어동은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만 보이는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범어동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아름답고 고귀한, 몇 안 되는 기억이었다.

범어동 1년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냥 그런, 도시 아이로 자랐을 것이다.

물론 그 1년 동안 무슨 대단한 사건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아름답고 따듯한 기억만 길게 흐르는 그런 이야기를 그림처럼 펼쳐보고 싶을 뿐이다.

봄 범어동 하면 우선 지천에 널린 산딸기가 생각난다.

누나와 함께 큰 대야를 들고 나가 잠시만 돌아다니면 한가득 따올 수 있었다.


봄, 가을로 대구 시내 많은 초등학교들이 집 뒷산에 소풍을 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 학교 애들이 소풍을 와 한창 놀 때는 동네 애들이 밖을 나오지 않았다.

오후 나절 그 애들이 떠나고 나서야 우르르 몰려나온다.

전리품 수확이 시작된다.

사이다 뚜껑, 콜라 뚜껑이 주요 수집 대상이다.

그걸 주워와 집 마당에서 돌로 두드려 평평하게 만들어 딱지처럼 가지고 논다.

시내 애들은 문구점에서 파는 동그란 딱지를 가지고 놀 때,

범어동 애들은 동그란 쇠붙이를 가지고 논다.

종이와 쇠붙이의 차이. 호사다. 우리가 더 부자다.


여름, 가을.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송충이 잡기에 내보곤 한다.

그러나 애들은 잡으라는 송충이는 안 잡고 나무에 새카맣게 붙은 풍뎅이를 잔뜩 잡아온다.

주머니 가득 잡으면 한30마리쯤 된다.

풍뎅이 올림픽을 펼친다.

요즘은 풍뎅이도 돈 주고 산단다.


아! 꼬리꼬리한 풍뎅이 냄새!


범어동에서 처음 축구를 배웠다.

20도 이상 기운 산비탈에서 동네 형들이 공을 찬다.

전, 후반 진영을 바꾸니 불평등은 없다.

선수가 모자랐던지 아홉 살 코흘리개도 끼워줬다.


동네엔 문구점도 구멍가게도 없었다.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배추 수확이 끝난 들판은 좋은 먹을거리 공급처였다.

이른바 배추 꼬리. 배추 뿌리가 지천에 널렸다.

손으로 쓱쓱 흙을 닦아내고 먹는 그 맛. 아는 사람만 안다.

지금도 김장할 때 배추 뿌리를 못 버리게 한다. 그 맛있는 걸 왜 버리는가.


그 외에도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그림 같은 기억이 많다.

동네 형들을 따라 산을 넘어 아폴로 11호 달 착륙 장면을 보러 갔던 기억,

도착하자마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들어 버려 정작 착륙 장면은 보지도 못했다던가.

캄캄한 논, 맹꽁이 우는 소리.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 물결...


그렇게 1년을 살고 우리는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난 삼학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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