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에서의 내 위치는 팀 차석이었다.
위로는 소장님 한 분, 아래로는 후배들이 여럿 있었다.
적응 기간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
팀의 주축으로 때론 소장님을 대신해야 했고,
도와줄 멘토는 따로 없었다.
오로지 부담감만이 양 어깨를 눌렀다.
‘아, 저들이 기대한 대로 여기서 죽어야 하나.’
1990년대 초반, 영등포는 보수적인 동네였다.
영등포역 부근은 번화가로서 원장님들 연령도 높았고 오래된 의료기관만 즐비해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기업체가 많고 지하철이 없는 여의도는 환자가 적었다.
우선, 전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필드에 나와 하루 2만 보를 걸었다.
거래가 있든 없든 문마다 두드렸다.
‘문고리 담당자’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개미처럼 끌어 모았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단박에 최고 실적을 내기 어려웠다.
누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랴.
씨도 뿌리지 않았는데 결과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한방이 필요했다. 큰 거 한방, 아주 큰 거.
담당 지역은 아니었지만 옆 동네 마포에 ‘사랑의 전화’라는 거래처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코미디언 심철호 선생이 설립한 사회봉사기관이다.
고민 있는 사람들의 전화도 받아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 하는 기관이었다.
글을 쓰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지금도 존재해 있다.
당시에는 그곳에서 무료 진료도 하고 있었다.
봉사에 뜻이 있는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재능 기부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진료를 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인천 경기도 등에서 수많은 환자가 밀어닥쳐서 늘 인산인해였다.
매일 무료 급식도 했으니 오죽 했을까.
한때 우리 회사와 거래를 많이 했으나 알 수 없는 오해로 거래가 끊어진 상태였다.
거래 자체가 불가능한 거래처로 여겨졌으며 게다가 주인도 없는 곳이었다.
거래를 포기한 무늬만 거래처.
담당 지역은 아니었지만 한 번 해보겠다고 자원했고,
회사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허락을 했다.
예상대로 막막했다.
병원은 북새통이었고, 상대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의약품 구입 권한이 있는 사무국장도 1주일에 한번만 나온다고 했다.
다른 사업을 하는 분으로서 봉사하는 개념으로 무급으로 나온다고 했다.
한 주를 기다려 만나기 위해 방문했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만날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까 거래가 있는 곳만 만난단다.
원천봉쇄.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그를 공략하려면 우선 정보부터 수집해야했다.
그가 안 나오는 날도 매일 찾아갔다.
너무 바쁘다 보니 많은 부분을 자원봉사에 의지하는 듯했다.
거절 당할까봐 아무데나 슬쩍 끼어들어 스스로 일거리를 찾았다.
무거운 물건도 들어주고 할머니, 할아버지 부축도 해드리고,
온종일 이일저일 하다 보니 누군가 물어왔다.
“누구시죠?”
양복입고 넥타이 맨 젊은 사람이 왔다 갔다 하니 신기했나보다.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약간의 기름을 친 대답을 했다.
제약사 직원이다.
거래를 하려고 다니다보니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신경 쓰지 마라.
알아서 도와드리다 가겠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 들어와 보라고 했다.
이왕에 하는 김에, 제약사 특기(?)를 살려 투약구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내심 ‘땡큐, OK’하고 바로 원내 약국으로 들어갔다.
약봉투를 쌌다.
요즘은 자동기기로 약봉투를 싸지만 그땐 그런 것이 없던 시절이라 사람 손으로 일일이 싸야 했다.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이내 자원봉사 약사님들과 친해졌다.
사무장님 성함은 신00 선생, 전직 제약사 직원으로 운수사업을 하며 매주 자원봉사로 병원 경영을 돕는단다.
그런데…….
얼마 후 약사님들을 통해 들은 그의 정체는,
아, 이럴 수가 있나.
아쉽지만‘마포 사랑의 전화’를 대형 거래처로 만들기까지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미뤄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