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제약회사 필드맨은 그리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타 업종에 비해 이직률이 높고 업무 스트레스가 과중하며,
술자리도 잦고, 바람둥이일거라는 선입관까지 퍼져 있었다.
게다가 판매와 함께 수금도 직접 해야 했던 시절이라 자기관리가 안 되면
금전 사고와 함께 심지어 도박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프지만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방만하게 살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 여럿 봤으니까.
그래서 회사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이런 부분에 관리가 철저했다.
고객과 연애하지 마라, 수금은 바로바로 입금해라, 노름하면 바로 해고다,
등등 귀가 아플 정도로 교육하고 감시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관리였다.
통신수단이 부족했던 시절, 흐트러지면 한 순간에 무너진다.
매일 출장을 나가야 하고 한번 나가면 뭘 하고 다니는 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연애 문제는 철저한 통제가 어려웠다.
청춘남녀가 눈이 맞아 사귀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그렇게 말리는 가운데도 약사, 간호사, 병리사, 방사선과 직원과 결혼한 친구도 있었다.
아무리 못하게 해도 끊임없이 사내 커플이 생기는 것처럼 나중엔 결국 회사가 지고 만다.
키 크고 잘생기고 인상 좋은,
말쑥한 20대 청년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냥 내버려 둘까.
나 역시 그런 유혹(?)을 제법 겪었다.
무더운 여름철, 땀을 뻘뻘 흘리며 병원에 들어갔을 때 시원한 음료수 한잔,
시간이 없어 점심밥을 걸렀을 때 내미는 김밥 한줄, 샌드위치 하나,
좀 심한 표현으로 모정을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는가.
기약 없는 객지 생활로 외로움이 깊어질 때,
회사나 하숙집으로 걸려오는 수많은 유혹의 전화들,
쉽게 물리치기 나 역시 힘들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용하게도 잘 빠져 다녔다.
회사나 선배들의 충고와 수많은 실패 사례의 목격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다 풀어내기도 벅찬 별의별 사연들.
난 거절을 모르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아니 친절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 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뿐이었다.
의사든, 간호사든, 병원 직원이든, 주변 사람 모두 “갑”으로 알고 살았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건 “거절”이다.
갑이 만나자는데, 갑이 연애 하자는데 쉽게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상대가 상처 받지 않게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정말 마음에 든 상대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난 다 거절했다.
유연하지 못한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더 중요한 인생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난 별종이었다.
“젠 아마 결혼도 못 할 거야.” 이렇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어왔다.
적당히 사귀고 그러지 뭐 그리 빡빡하게 구냐는 것.
하지만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난 스물아홉, 입사 3년차 때 연애를 시작했다.
은행원이랑.
처가 친척, 아내 친구로부터의 무언의 견제를 뚫고 결혼에 성공했고 애 둘 낳고 36년째 잘 살고 있다.
큰 싸움 한 번 안했고, 술 먹고 외박 한번 한적 없다. 물론 도박도 안 했고.
오순도순 사이좋게.
만약에 내 딸이 필드맨을 데려온다면?
반대하지 않는다.
대신 조건이 있다.
첫째, 3~5년은 한 회사를 유지해야 한다.
둘째, 실적이 월등 좋아야 한다(브리핑 받을 거임).
셋째,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 업종에서 5년 이상 좋은 성적으로 버틸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다.
근데 난 무려 38년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