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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합니다. 원장님

by 신화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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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신길동에 00 성심 의원.

나보다 열 살 쯤 위인 원장님.

인수인계서에 “가지 마라”라고 쓰여 있음.


개업한 지 오래된 탓인지 거래처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

가봐야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그런 병원이었다.


‘그런 게 어딧어. 환자 많던데 뭐.’


쉽게 만나주시기는 했다.

거래를 터주지 않아서 그렇지 설명만은 잘 들어주셨다.

이런 거래처는 기대 없이 습관처럼 들르는 것이 좋다. 실망하니까.


그렇게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내가 제일 잘하는 들락날락.


어느 날,

대기실에서 면담을 기다리다 만난 경쟁사 담당자에게서

원장님의 취미가 바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바둑이라면 깜빡 죽는 이른바 “광”이란다.

경쟁사 자기는 바둑을 못 둬서 많이 힘들다고 하면서.


‘아하~!’


당연히, “원장님, 바둑 좋아하세요?”


“응? 자네 바둑 둬?” “넵!” “가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휴게실 겸 의약품 보관 창고로 끌고 갔다.

처음 들어가 본 창고에는 바둑판이 깔려있었다.

원장님의 바둑 실력은 상당한 수준의 고수였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저어~ 높은 경지.


‘아~~ 바둑, 이건 무기가 되지 않겠구나.

나 같은 하수와 두는 바둑이 뭐가 재미있겠어... 에라 모르겠다.’

“원장님, 바둑 좀 가르쳐 줍쇼!” 그냥 한번 던져봤다.

“그럼 한번 깔아 봐.”


석 점을 깔고 뒀다. 그래도 버거웠다.

그렇게 한판 두고 돌아설 찰라,

“내일 또 와야지?” 하셨다.


‘뭐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짐짓 한발을 뺏다. 빼는 맛...


“아~~~ 매일 뵙긴 힘듭니다. 갈 곳이 많고 거래가 없어서...”

“어, 그래. 이 약, 저 약이 급하니까 내일 자네가 직접 들고 와!”


그렇게 또 하나의 거래처를 얻게 되었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 당연히 인터넷 바둑도 없었고 30평 공간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바둑광 원장님은 너무나 바둑이 고프셨던 것이다.

이후 거의 매일 원장님을 만났다.


“어휴, 원장님, 이렇게 매일 부르시면 저 일 못해서 짤려요. 가끔씩만 불러 주세요.”

이러면 어김없이 새로운 주문이 나온다.

“이제 됐지? 내일 봐.” 그럼 못이기는 체 하면서 “네!”한다.


비록 석 점을 깔고 두는 바둑이었지만 승률은 팽팽했다.

아무리 석 점 바둑이라도 원장님이 많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원장님은 바둑을 두시다가도 환자가 모이면 진료하러 가신다.

대여섯 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돌아오기를 서너 번 반복해야 겨우 바둑 한 판이 끝난다.


“어? 이렇게 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제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


난 나쁜 놈. (과연 원장님이 모르셨을까?)


중간에 도망갈까 봐 점심도 먹여주시는 등,

바둑 두는 담당자에 대한 원장님의 사랑은 각별했다.

병원 바로 옆에 붙어있는 원장님 댁에서 먹는 점심은 참 맛있었다.

특히 사모님이 끓여주신 미역국 맛은 말로 설명 못한다.

아~~ 고등어조림도.


“원장님, 죄송합니다. 그 승률은 조작이었습니다.

거의 다아~~~ 원장님이 이기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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