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말, 직장을 구해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 그 전까지는 서울 여행 한번 변변히 못 해본 그야말로 쌩 촌놈이었다. 입만 떼면 촌내가 풀풀 나는…….
서울에 올라와 첫 번째 난관은 “말”이었다. 군 복무 시절 여러 지방 사람들과 섞여 살아 본 경험은 있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생계를 위한 타향 사람과의 동거는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당연한 난관이었다.
게다가 매일 고객을 대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거친 사투리는 절대 유리한 점이 아닌 장벽이었다. 심지어 말 때문에 노골적인 클레임을 듣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말 때문에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러나 정체성을 지키고 싶다는 치기 어린 아집 때문에 한사코 말 고치기를 거부했다. 아마 몇 번의 충격이 없었다면 영원히 사투리를 바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막 입사한 신입 시절이었다. 임원 한 분이 동석한 회식 자리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임원분이 내게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셨다. 영문을 몰랐다. 잠시 후 대놓고 말씀하셨다.
“자네는 왜 자꾸 반말을 하지?”
“제가 언제…?”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동향 선배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더 큰 오해가 생길 뻔했다.
“얘네 동네 사투리가 그래요. 절대 버릇이 없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서울이 첨이라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야! 너 서울말 배워! 영업하는 놈이 어쩌려고 그러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후 말끝에 무조건 열심히 ‘요’를 붙이기 시작했다.
한 번은 한 거래처 원장님이 내 사투리가 듣기 싫다고 회사에 전화해서 담당자를 바꿔 달라고 하기도 했다.
결국, 그 거래처는 서울 사람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건 충격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 때문에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고치자.’
그러나 말이라는 게 그리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억지로 서울말을 쓰려고 하니 점점 어색해지기만 했다. 서울말 쓰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정작 해야 할 말을 놓치기 일쑤였으며, 점점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무조건 위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어디 서울말 가르쳐주는 학원 없나?’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죽자사자 연습에 몰두했다. 일과 후 하숙방에서 거울 보며 연습하고, 술집에서 서울 동기들과 어울리며 실전 연습을 했다.
그 후 몇 달, 갑자기 이게 되는구나 싶은 날이 왔다. 고향 사람 만나면 고향 사투리로, 타향 사람 만나면 서울말로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드디어 염원했던 팔색조가 된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세월이 40년이나 흘렀다.
지금은 억양이 조금 남아 있을 뿐, 서울말을 토박이처럼 잘 구사한다.
물론 고향 가면 고향 사람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다는 부작용은 생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