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은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우리 대학 문리대 학장이셨다.
또한 고3 때 담임이셨던 도광의 시인의 은사이시기도 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은 물론이고 〈꽃〉, 〈꽃을 위한 서시〉등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작품을 남기신, 그야말로 자평 타평 슈퍼스타 시인이시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워낙 많이 듣고 배워 얼굴은 몰라도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분, 김춘수 선생.
1980년 봄, 무슨 단과대 행사인가에서 축사를 하시는 당신 얼굴을 처음으로 뵈었는데, 그냥 조그맣고 여윈 초로의 노인이었다. 겨우 오십대 후반이셨을 텐데 말이다.
목소리도 너무 작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 저분이 김춘수 선생이구나.’
순수시 제일주의자였던 도광의 선생님의 평가는 다소 박했다고 기억한다.
중반 이후 그가 몰두했던 실험 시, 무의미 시, 즉 Nonsense poetry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초기 시는 참 좋았는데’ 하시면서 말이다.
충분히 서정주나 박목월의 반열에 드실 수 있었는데 너무나 아쉽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장탄식에 까까머리 우리도 덩달아 탄식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말씀을 하시던 순간, 교실은 한숨 소리로 가득 찼다.
뭐 어쨌거나 그래도 시인의 순수한 의도나 실험 정신만은 높이 평가하셨던 것 같다.
도광의 선생은 시인의 가방 모찌 역할까지 자랑스러워하실 정도로 팬이었으니까 그 쯤에서 멈추셨을 것이다.
대개 선생님은 누구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거의 욕설에 가까운 비판을 서슴없이 퍼부으시는 분이었다.
그 이후, 김춘추 선생은 더 안 좋아지셨다. 정치인의 꼬드김에 넘어가 5공에서 팔자에 없는 국회의원을 지내셨고 이 일은 큰 오점이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의 발목을 잡았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와 총독부를 비판하다 투옥까지 경험하는 등 정의의 투사 같은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100%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 세월이었다.”
후회하고 변명하면 뭐하나.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말년에 시인은 먼저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다.
가난하고 초라하게 홀로 남은 노인 김춘수 시인은,
돌아가시기 3년 전인 2001년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 다음과 같은 시를 수록했다.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 지짐이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아~
늦기 전에
옆에 있는 사람의 손 한번 잡아 보고 어깨 한번 툭 치고 정답게 웃어주자.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