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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년 전 조상으로 부터

by 신화창조

권상충은


1593년(선조 26)∼1643년(인조 21). 조선 중기 처사(處士). 자는 자하(子夏)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본적은 경상북도 안동(安東)이며, 출신지도 경상북도 안동이다.

증조부는 권벌(權橃)이고, 조부는 권동보(權東輔)이다. 부친 권래(權來)와 모친 김륵(金玏)의 딸 예안김씨(禮安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김집(金潗)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계모(繼母) 이씨(李氏)를 생모처럼 정성을 다해 섬겼고 아우들과 우애를 돈독히 하였으며, 어려운 친척과 이웃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을 당해 떠돌아다니는 양갓집 규수들과 걸식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곡식을 내어 구휼하면서 시종일관 낯빛을 바꾸는 법이 없었다.


향년 5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목(權霂)‧권국(權輂)‧권홍(權霐)이다.

묘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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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17세 :

나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종손 권상충이다. 우리 집안은 증조 할아버지(권벌)때부터 유곡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유곡 권씨라고 불리운다.

나는 어려서 5세 때부터 아버지(권래)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익혔고, 아버지의 사촌 매부인 이영도에게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웠다. 이영도는 할아버지(권동보)의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의 손자로, 삼계서원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마을의 젊은 선비들을 교육하였다.


2) 17세 :

나의 혼례가 결정되었다. 상대는 안동의 천전(내앞)에 거주하는 김집의 딸이다.

이미 사주단자를 보냈고, 조상님의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에까지 고하였다. 그 아가씨를 한번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은근히 불안하기도 하다.

'아주 못생겼거나해서 정이 안 붙을 여자면 어떡하지?' 그러나 '어디 혼인이 내 혼자의 일이며, 내 감정에 따라서 하는 일인가?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후사를 잇기 위한 집안과 집안 사이의 일이 아닌가?'

사실 처가될 집안은 우리 집안과 오랜 친분이 있다. 장인 어른 김집의 아버님인 김성일은 훌륭한 학자가 맡는 홍문관 부제학까지 되신 분으로 우리 할아버지 형제분(권동보, 권동미)과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던 것이다.

그만한 집안의 딸이니 만큼 남편에 순종하는 부인의 도리를 잘 아는 여자일 것이다. 또한 두 집안은 이로써 더 가까워질 것이 아닌가? 혼례일이 되면 처가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를 데리고 돌아올 것이다. 예전에는 남자가 결혼한 후 처가에 눌러 앉아 살림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 유곡에 자리를 잡았던 것도 이래서였다. 하지만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인데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를 간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여자가 시집을 오는 주자가례의 예법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3) 20세 :

아내가 아들 목(목)이를 낳았다. 가문의 대를 잇고, 조상님 제사를 받들 종손이 태어난 것이다.

최소한의 효도를 하였다는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가여워지기도 한다. 아버님과 나처럼 종손의 의무를 수행하느라 자신의 생활을 희생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나도 공부에 재주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결혼 이후 성인으로서 아버님을 도와 집안일을 꾸리다보니 집중해서 독서할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일년에 모시는 각종 제사는 20여 차례에 달하는데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정성을 다한다.

며칠 전부터 음식 준비에 신경을 써야하고, 제사 전날 깨끗이 목욕을 한 뒤에 제사상과 음식을 진열하고 신위를 모셔오면, 이미 제사를 지낼 때이다. 또한 우리 집안과 교제를 하는 이 고을의 유력한 양반들을 접대하고 방문하는 것 역시 보통일이 아니다.

과연 내가 과거에 합격할 수 있을까? 그러나 관리가 되어 세상을 경영하는 것만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조상 없이 자손이 있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다.

조상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가 어찌 관리로 나라에 충성할 수 있으며, 평민ㆍ노비들에게 분수를 지켜 윗사람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또한 고을의 양반, 군자와 사귀며 아랫것들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집안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4) 40∼42세 :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의 인중 위에 솜을 놓아서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하랴? 상주로서 상례가 법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고려 때에는 불교가 성하여 중을 불러다가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거나 시신을 앞에 두고 밤새 노래부르고 노는 등 잘못된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바른 도리이자 국가가 권장하는 유교의 예법에 따라야 할 것이다. 예법대로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가신 지 4일째 되는 날에 정식으로 상복을 입었다.

이날부터는 미음을 먹는 것이 허락되지만, 사무치는 슬픔에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아침, 저녁으로 上食을 올리고, 밤이면 이부자리를 펴서 혼백을 모시기를 1개월 한 뒤 시신을 산에 모셨다.

그 후 만 2년 묘소 옆의 움막에서 아침, 저녁으로 아버님께 음식을 올리고 묘를 돌보았다. 살아 계실 때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진실한 마음은 바른 예절을 갖출 때에 더욱 깊어지기 마련인 모양이다. 양반으로서 예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나라에서 효행을 표창하는 정문을 내렸다.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다.


6) 50세 :

서원에서 향약 모임이 열렸다.

한해 동안의 마을 사람들의 선행을 격려하고 악행을 처벌하는 자리였는 데, 도약장(향약의 최고위 임원)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근래 풍속이 야박해져 선행을 행한 자들은 적었고, 이웃이나 형제간의 분쟁, 심지어는 불효와 상놈이 양반을 모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잘못한 자들 가운데 양반은 한나절동안 마당에 세워 웃음거리를 만들었고, 소작료를 깎아달라며 양반에게 불손한 말을 한 유검동이란 상놈은 매 40대를 때린 후 관가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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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혼미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래도 옛 어른들이 가르치신 예법을 따라 인륜을 지키며 살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통해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가업(재산)이 다른 성씨에게 넘어가는 일도 없었으니 다행이다.


목아! 아들도 딸도 모두 내 자식들이니 어찌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주고 싶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랬다가 너희 삼 형제에게 갈 재산이 적어져 조상의 제사를 잘 치르지 못하게라도 되면 아비는 죽어서 조상님을 뵐 면목조차 없을 것 같구나.

그래서 생각 끝에 토지는 너희 삼 형제에게만 공평히 나누어주고, 종손인 네게는 제사 비용으로 토지를 좀 더 주기로 했다.

다만 귀여운 외손들을 생각하니 차마 노비마저 물려주지 않을 수는 없구나.

너희 매형들도 내 마음을 아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너는 내 뜻을 헤아려 내 죽은 뒤에라도 부모의 피와 기를 나눈 형제들이 재산을 두고 싸우거나, 방탕한 생활로 조상들이 물려준 재산이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서 제사마저 끊어지는 불효를 저지르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이웃의 군자들과 사귀고 관가의 명령을 잘 따라 마을에 효도와 충성의 기풍이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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