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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 본 Nov 18. 2020

전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거친 들을 걸어가야 했다. 모진 비바람에 넘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쓰러지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지쳐 쓰러져 나의 모든 힘이 빠져 버렸다. 세찬 폭풍우에 맞아 쓰러진 나무처럼 내 모든 욕망이 깨져버리는 순간을 겪고 나자 마침내 그곳에, 가장 낮은 곳에, 보잘것없는 곳에 찬란한 여명이 비추고 있었다. 긴긴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을 지나고 나서야 가장 아름답게 비추는 한줄기 새벽빛을 머금은 이슬방울이 된듯싶다.


이슬방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눈여겨보지 않던 내가 나만 보던 세상에서 내 밖의 세상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보이지 않던 세상을 보게 되니 내 주변의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나의 노력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고 물리적인 힘으로 열 수 있는 문도 아닌 듯싶다. 어쩌면 그것은 내 힘이 모두 소멸되어야 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욕망에 매어 바둥거리던 몸과 마음에서 나의 힘이 모두 눈 녹듯이 사라지자 몸보다 마음보다 훨씬 더 큰 날개가 생겼다. 새처럼 가볍게 날아가 듯 기쁘다. 딱딱한 고치 안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낸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 꽃잎 위로 사뿐사뿐 가볍게 올라앉았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도울 수 있어서 기쁘다. 그동안 힘쓰지 않아도 되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벼워진 심신에 나도 모르게 또다시 내 욕심이 채워질까 두렵다. 이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욕심 없이 살고 싶다.  


환희에 찬 눈으로 보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되자,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게 되어 나에게 쏠려 있던 시야에서 나의 밖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즉, 세계관이 달라졌다. 이 세상에 모든 일 앞에 자유롭게 되었다.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행복하고 부족해도 조바심 나지 않는다. 그저 현재에 집중하고 즐길 뿐이다. 전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경 쓰기 싫어서 도망치듯 지나치던 사람이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보이지 않던 숨겨진 사람들의 마음과 아픔들이 보인다. 아픔이 보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있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을 때리고 괴롭힐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지시도 따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도대체 어떻게 타이르고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엄포를 놓기도 하고 야단도 치고 잘 알아듣게 설명도 한다. 그러나 잠시뿐이다. 나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학생만 신경 쓸 수 없어서 무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학생에게 마음이 더 쓰인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을 괴롭힌 그를 타이르던 중 그의 손을 봤다. 작고 통통한 오므라뜨린 고사리 같은 그의 손이 너무나 예쁘게 보였다. “손이 정말 정말 예쁘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니? 너도 알고 있었어? 너의 손이 이렇게 예쁜지? 이렇게 손이 예쁜데... 너의 행동도 손처럼 예쁘면 더 좋겠다.” 예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며 그는 자기의 손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 어색해했다. 전에 그런 찬사를 들어보지 못해 멋쩍은 듯 자기 손을 뒤로 빼고 부끄러워했다.     


그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괴롭히는 이유를 다 알 수 없어도 무언가 위로가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그 학생과 꼭 닮은 곰인형이 하나 있었다. 그 학생이 생각났다. 그에게 내가 갖고 있던 곰인형을 주며 말했다. “네가 이 인형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주면 어떨까? 이 인형이 너의 친구가 되어 줄 거야.” 그는 무척 좋아했다. 내 아들의 애완견 이름, '초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전에 나는 내 수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학생들을 괴롭히는 그런 학생을 대할 때 화를 잘 냈다. 그런데 지금은 큰소리를 치거나 화를 내는 것이 힘들다. 몸에 힘이 없어서 화를 내기가 몹시 어렵다. 화를 내는 것이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렇다고 전혀 화를 안 낸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해 참을 수 없어서 화를 냈다가도 곧 후회가 된다. 화를 냈던 상대방에게 곧바로 사과를 해야 편안해진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울분을 내 마음에 품고 꽁꽁 묶어두고 풀지 않고 쌓고 살았는지, 지난 나의 모습을 보니 부끄러워진다.     


그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볼품없는 하찮은 것들이 한없이 아름답게 보인다. 좁은 시야로 보던 세상이 넓은 시야로 보니 칭찬할 것들이 보인다. 말 안 들어서 미워져야 할 학생의 장점이 보이고 칭찬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주고 싶다.     


그동안 무시해 왔던 다른 사람들의 아픔들이 보인다. 며칠 전 친구랑 나는 김밥을 싸서 공원에 갔다. 볼품없이 비닐봉지에 질끈 묶은 마스크 3개를 가져와서 사달라는 사람을 만났다. 처음엔 무조건 안 산다고 거절했다. 김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얼마냐고 다시 묻는다. 3천 원이라고 해서 5천 원짜리를 주자 잔돈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 기분이 나빴다. 안 사려는 맘도 있었지만 5천 원 주고 3천 원짜리 마스크를 사주고 나서야 비로써 김밥이 넘어갔다. 소소한 일이지만, 전에는 이런 일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사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있었고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졌다.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으니 밝게 살고 싶다. 다시 넘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보고 보듬었으면 좋겠다. 지나간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 시간을 쏟기보다는 지금, 현재에 집중하며 행복하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적 가치로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갖은것이 더 없는 상태인데 더 감사하고 더 기쁘다. 없어서 더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빈 공간에 무엇인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고 기대가 된다. 채워질 무언가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과정을 가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채워지지 않더라도 감사하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행복하니까.     


더 나아가 자연의 속삭임이 들린다. 흐르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인생의 흐름을 읽는다. 희미하게 시작된 하루 해가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이글거리는 열정이 있는 정오를 지나 저녁때가 되면 자신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불태우며 주변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처럼, 어떤 누구의 눈도 시리지 않게 비추는 노을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삶을 살고 싶다. 땅이 쏙 밀어낸 새싹으로 시작한 봄이 뜨거운 여름의 푸르른 정열을 품고 가을의 열매를 맺고 모든 것을 덮는 눈이 오는 겨울로 마감되는 것처럼, 추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지만 모든 것을 덮는 하얀 눈이 있어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삶으로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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