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든 타임 있다 -
16일 꽁돈 40만 원이 생겼다. 그런데...
요즘 아이가 지구환경을 생각한다며 텀블러에 물을 갖고 다닌다. 친구가 선물해 준 예쁘고 귀여운 물병에. 귀여운 곰돌이와 딸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 아주 흐뭇하다.
지난주 화요일 가족톡에 긴급메시지가 떴다.
학교 가는 도중 옆구리가 차가워 가방 안을 들여다보니 텀블러 뚜껑이 반쯤 열려 있더란다. 옷이 젖은 건 상관없으나 노트북이 물을 잔뜩 먹었다는. 그날따라 넉넉히 마시겠다고 물도 꽉 채워가더니만... 아이가 마시기 전 노트북이 홀라당 다 먹어버린 거다.
딸 : 어떻게용?
아빠 : 전원 켜지 말고 일단 물기 제거해.
엄마 : 되는 대로 일찍 오기 바람.
딸 : 오늘 알바라 10시에 끝나는디요.
이런~일찍 와도 10시 30분이다. 서비스센터는 6시까지니 다음날을 기약해야 한다. 수요일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니 아이가 근처 서비스센터를 찾아놨다.
충분히(?) 수분을 보충해 표정이 풀린 노트북을 본 기사님이 옅은 미소와 작은 한숨을 동시에 뿜어내셨다. 권해주신 자리에 앉았으나 불안한 마음에 좌불안석이었다. 도르륵 이 녀석이 자신을 드러냈다. 드디어 사각형의 기계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 얇디얇은 노트북 속에 이렇게 많은 칩과 부품이 있을 줄이야! 핀셋과 드라이버로 하나씩 떼어내셨다. 정교하고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냥 봐도 노트북 뱃속이 촉촉해 보인다. 녀석 진짜 많이 먹었군!
갑자기 아이 어릴 적 갖고 놀던 실바니안 가족의 아주 작은 소품들이 떠올랐다. 아이 손으로 잡기에도 작은 이것들은 우리의 감정 쌓기 놀이에 꼭 필요했던 소품들이었다. 그 소품들이 얽히고설켜 우리의 추억을 만들어냈었지. 15년 전 실바니안 소품들이 아이의 감성을 만져주었다면 이제는 노트북이 아이의 아이디어를 담아주고 있는데~ 이리 물을 먹고 배가 빵빵해졌으니 원...
"부품을 다 뺐으니 세척해서 말려야 해요. 부분적으로 하얗게 보이는 건 벌써 부식이 진행됐단 거고요. 하룻밤 말려봐서 부팅이 되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본체를 갈아야 할 수 도 있어요. 비용은 80만 원쯤..."
이쯤 되면 사는 게 낫지 싶지만 기말고사 내용이 다 노트북에 담겨있어 그럴 수도 없단다 지금은. 애써 웃어 보였지만 수리비를 생각하는 내 속은 타들어갔다.
다음날.
본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단 액정이 좀 심하게 부식돼 이건 갈아야 한다고. 35만 원이란다. 다행스러운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즘 텀블러를 갖고 다니는 분들이 많아 하루에 한 번은 꼭 물먹은 노트북이 실려 와요. 노트북의 골든타임은 빠를수록 좋답니다. 당장 서비스센터에 갈 수 없는 상황이면 전원을 끄고 노트북을 텐트처럼 세워 말려주세요.(위의 사진처럼)
접어놓지 마시고요!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 그려. 앞으론 물병 뚜껑 닫고 꼭 확인하라 일러뒀다.
이리하여 내 꽁돈은 날개가 돋친 듯 날아가 버렸다.
5만 원밖에 안 남았다? 5만 원이나 남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어디까지나 나의 몫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