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운만 피해도 행운 -
얼마 전 오랜만에 강릉에 갔다. 강릉이 고향인 남편이 만날 사람이 있다 하여 따라간 것이다. 서울에서 낳고 자란 나는 지방이라곤 거의 가 본 곳이 없다. 강원도밖에. 결혼하고 근 30년을 다녔으니. 시부모님은 1999년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를 하셨기에 결혼 5년 차에 접어들어선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지만 우린 늘 휴가를 강원도에서 즐겼다. 강릉, 속초, 주문진, 양양, 고성 등. 그렇다고 이 지역들이 바로 옆은 아니다.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이지만 남편에게 있어 마음의 거리는 10분이다. 오래 살면 서로 닮는다고~ 이 심리적인 거리가 나에게도 스며든 것 같다.
그날도 그랬다. 일을 보고 나면 정오쯤 될 테니 기왕 간 거 맛있는 것도 먹고 분위기 있게 커피도 마시기로 했다. 일을 마치니 12시. 밥 먹으러 어디로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이 녀석의 시동소리가 가래 끓는 것처럼 그렁그렁 했다. 2006년에 사서 30만 킬로 정도를 운행했으니 차가 오래되어 우렁찬 맛은 없으나 노련하게 우리를 안내해 주기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갓난아기가 자신의 상태를 울음으로 표현하듯 자동차는 자신의 상태를 색깔을 달리 한 경고등으로 나타낸다고 들은 적이 있다. 순간 '주인장 나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라는 듯 차가 좀 털털거렸다. 바로 자동차 계기판에 배터리 모양의 빨간색 경고등이 들어왔다.
검색해 보니~
배터리에 문제가 있거나 교체한 지 얼마 안 됐다면 제너레이터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그 상태로는 절대 운행하면 안 되며 바로 서비스센터로 갈 것이라 쓰여 있었다. 만약 제너레이터를 교체한다면 비용은 40~60만 원 정도라고 한다. 남편이 말하길 배터리는 교체했단다. 교동 사거리에 차를 세웠다. 카센터가 은근 눈에 뜨였으나 문 연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아 오늘은 일요일이지!
바로 자동차보험 서비스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직원분이 무조건 차를 정지시키고 기다리라 하셨다. 견인해야 한다고. "얼마나 기다려요?" "한 40분 내로 도착해요. 일요일이라 시간이 좀..." 구성진 강원도 사투리가 귀에 꽂혔다. 이리하여 남편과 난 때 아니게 쌓여 있는 눈과 함께 길가에서 설경을 감상했다.
30년 전 처음 강릉에 왔을 때의 느낌이며 밤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 20대 중반의 설렘, 결혼 초 대관령 고개를 넘을 때마다 멀미로 고생했던 일 등. 짤막한 독립영화같은 장면들이 스쳐갈 즈음 어느새 현실로 돌아왔다.
서비스센터 직원분의 도움으로 카센터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견인되는 차 안에 타보다니 재밌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신기하긴 했다.
바로 카센터 직원분이 장갑을 끼고 준비태세를 갖추셨다. 제너레이터 고장이라 부품을 교체해야 하는데 일요일이라 신제품은 없고 재생품으로 바꿔준단다. 대신 가격은 18만 원 정도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오래된 차라 큰돈을 들이고 싶진 않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면 된다는 수리시간은 긴 바늘이 두 바퀴 이상을 돌고서야 끝났다.
"제너레이터 갈았으니 앞으로 10만 킬로는 더 뛸 수 있을 겁니다. 근데 배터리 교체는 왜 한 번도 안 하셨어요?" 순간 당황스러움은 남편의 몫이었다.
아무튼 수리를 마치고 나니 3시가 넘었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으나 굳이 양양 가서 먹잖다. 심리적인 거리계산이 또 발동한 듯했다. 맛있게 생선구이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늘 하루를 되짚어봤다.
모처럼 강릉 당일여행을 계획하고 왔으나 자동차 고장으로 눈 내린 고즈넉한 분위기를 카센터에서 주인장의 강아지와 함께 보냈고 본의 아니게 점심도 걸렀고, 돈도 18만 원이나 지출하고...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지.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만약 경고등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면 차가 갑자기 멈춰 섰을 것이고 그 장소가 전혀 가보지 않은 곳이거나 고속도로였다면 삼각대를 세우고 비상등을 켜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정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을 수도 있고.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라는 책이 있다. 평균 나이 72세 이상의 우리 시대 '어른'들이 건네주시는 조언 모음집 느낌의. 그날 난 니시나카 츠토무(일본의 변호사)라는 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스스로 생각의 잣대를 갖고 살아야 불운을 피할 수 있어요. 따지고 보면 불운만 피해도 얼마나 행운이고 감사한 인생인지요!"
다른 도시가 아닌 강릉이어서 다행이고 바로 자동차보험 서비스센터로 전화한 것도 다행이고 수리비도 예상 금액의 절반밖에 들지 않은 것 또한 다행이었다. 배고픔에 평소 즐겨 먹지 않던 생선구이를 4마리나 먹고 오십 넘어 그 참맛을 느낀 것 역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모든 일이 다행을 넘어 행운이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삶의 방향이 행운과 맞닿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