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에 의한 희망퇴직 후 이직은 쉽지 않았다. 회사 상황이 불안했던 만큼 진작부터 이직 준비를 했건만. 아내와 상의하면서 해외 취업도 고려해 보자고 했다. 오히려 국내보다는 해외 채용 면접 기회가 더 많았다. 합격 가능성이 있던 회사들이 제법 있었지만 단신으로 가야 하거나 영어가 조금 부족하거나 채용 포지션에 비해 과스펙이라 포기하거나 불합격되었다.
이때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
안녕하세요 박지현 씨 되시죠? 네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는데 해외근무 선호하신다고 하셨나요? 네 그런데 이디시죠? 아.. 헤드헌터입니다. 회사 하나 소개드릴까 해서요.
채용사이트에 공개했던 이력서를 보고 헤드헌터가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회사는 코스닥 상장의 나름 규모 있는 회사였다. 그동안 숱한 면접에 별도로 더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해외근무인 만큼 영어면접이 걱정되었다. 다행히 무사히 영어면접까지 마쳤다. 영어심화면접은 별도로 대기업 출신의 임원분이 진행할 수도 있다는 단서와 함께...
그리고 날아온 합격 통보. 기쁨과 동시에 영어로 적응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더구나 장롱면허와 다를 바 없는 운전실력인데 차선이 반대라니!?
이 두 가지 두려움을 안고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불안한 운전실력
나는 경영지원팀 소속으로 관리 전반을 맡아야 했으므로 도착하자마자 운전을 바로 해야만 했다. 두려웠지만...
'어려울 게 뭐 있어...'
속으로 생각하며 도전!!!
반대인 건 차선만이 아니었다. 깜빡이를 켜려고 하면 와이퍼가 움직였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자꾸 기어를 잡는다. 생각 없이 우회전을 하면 차들과 마주하게 되고 차가 없을 경우엔 역주행을 하기도 했다. 운전석이 반대다 보니 차를 차선 안에 못 넣고 차선을 밟아가며 운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운전이 어려운 건 길을 숙지하지 못할 때가 크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구글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 반복을 통해 완벽해진다 했던가... 지금은 어디를 가든 두려울 게 없다.
#두려운 영어
What is your number? Zero. ...one...seven...
숫자가 입에 붙지 않았다.
'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출퇴근하면서 틈날 때마다 숫자를 영어로 말했다. 'one, two, three... sixty...' 역시 운전과 마찬가지.. 반복의 힘은 정말 컸다. 초기에 정말 버벅거렸지만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 영어의 순발력.
2006년 어학연수로 필리핀에 갔을 때만 해도 난 제대로 영어문장 한 두 마디 하기가 어려웠다. 그전까지 참 여러 가지 영어공부법으로 공부한다고 했고 수십 개의 문장을 외우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준별 반 배정을 하는데 5개 그룹 중 4번째였다.(실력 순위로). 좀 실망스러웠지만 열심히 수업을 따라갔다. 말 한마디 못 해 질문을 받으면 모른다고 답변하는 수준이었지만 수업 외 모임에도 참석했다.
2달이 지난 후...
비록 완벽한 문장은 아니지만 문장을 말하기 시작했고 실력이 어느 정도 인정되어 5개 그룹에서 2번째 그룹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혹자는 2달 만에 어떻게 영어를 말하게 되었는지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필리핀 가기 전에 익혔던 문장과 내용들이 말하는데 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영어의 기초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학창 시절에 영어 점수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영어는 독해와 문법 등에 치우쳐 있던 것. 그렇지만 영어 말하기에 도움이 되는 건만은 분명하다.
그 이후 한국에 와서 외국계 회사에 취업도 하고 영어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영어 학원도 꾸준히 다녔다. 누군가 '언어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필리핀에서 쓰던 만큼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좋은 기회들을 놓친 건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도 영어를 아주 잘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회사 업무 초기 셋업을 위해 필요한 현지 업체 혹은 관공서와 미팅이 참 많았다. 투자 인센티브, 공장 승인, 전기, 소방 안전 승인 등등... 그 덕분에 긴장하면서 영어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생업이 달린 일이었고 필리핀에서 말 문이 트였던 경험으로 금세 영어의 순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영어
말레이시아는 영어권 국가이다. 영어가 제2 공용어라 할 정도로 회사 관련 서류들은 대체로 영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관리직들은 학력과 거의 무관하게 영어를 할 수 있다. 다소 실력의 차이는 있지만 업무 처리하는데 필요한 의사소통으로는 충분하다. 그래도 기대보다는 실망했는데 현장직 중 관리자급을 제외하면 영어를 못하는 건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영어 실력이 그다지 좋다고 생각은 않지만 상대적으로 잘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여기서는 영어를 참 쉽게 쓴다. 영어권 국가에 다민족 국가, 그리고 자국어인 말레이어가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력 때문인지 몰라도 말레이어를 쓰는 대로 영어를 쓴다.
예를 들어 'boleh'와 'can'을 보자.
'boleh'는 '할 수 있다.'는 뜻의 말레이어다. 실제 회화에서도 쓰이는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할 수 있어?'라고 물을 때 영어로 'Can you do it?'이 라고 하지 않는다. 바로 'Can?'이라고 한다. 얼마나 실용적인가? 나도 영어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표현하려 하지만 편하다 보니 따라가게 된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없다'라는 뜻의 'T'ada'라는 말이 있다. 'Tidak ada' 줄임말이다. 영어로 표현하기 애매하다. 영어는 주어(가주어 일지라도)가 있어야 하고 무엇이 없는지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선 영어로 'No have'라고 사용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아주 정확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영어도 결국 언어로서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영어울렁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