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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계절에 나는 떠났다. (4월 제주 일곱째날)

2022년 4월 7일

by 은동 누나

꽃은 지고 초록의 세상이 온다.


바람이 분다. 세찬 바람이 이곳이 제주인 것을 실감하게 한다.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눈앞의 유채꽃이 한 방향으로 누워있다. 푸른 바다가 거세게 일렁인다. 세화로 걷는 길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제주는 바람의 나라다.


어제 제주방송을 보다가 곶자왈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10년 전, 폭염주의보가 내린 여름에 저지곶자왈 14-1 코스를 걸었다. 그날도 아침을 건너고 저지마을에서 시작했는데 마땅히 먹을 식당이 보이지 않아 걷다 보니 곶자왈로 들어섰다. 숲의 울창함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폭염주의보가 내린 한여름, 더위와 배고픔에 지쳐 이 숲에서 내가 죽어도 백 년 후에도 아무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른 차밭이 보이고 '오설록'이 천국처럼 다가왔다. 오설록에서 녹차 프라푸치노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는데 남편이 이제 코스의 반을 걸었을 뿐이라고 다시 출발하자고 했다. 나는 그만 돌아가자고 떼를 썼고 결국 다시 신비로운 곶자왈로 들어갔다. 그날의 더위와 배고픔 때문인지 저지 곶자왈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오늘은 선흘리에 있는 동백동산으로 곶자왈을 만나러 간다. 선흘리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고등어와 고기를 함께한 밥상을 남김없이 든든히 먹고 곶자왈로 들어섰다.



비밀의 숲의 입구에서 한걸음 들어섰을 뿐인데 무성한 짙은 초록이 다가온다. 곶자왈은 숲과 덤불을 뜻하는 말로 나무와 덩굴로 이루어진 숲이다. '도틀굴'이라는 용암동굴이 있다. 4.3 사건의 아픈 역사가 남아있다. 부드러운 길 위에 동백꽃잎이 떨어져 있다. 길을 걸으며 선흘리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숯가마터와 같은 흔적도 보인다. 초록의 이끼가 가득한 바위틈에 뿌리내린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니 동백동산의 보석, '먼물깍'에 도착했다. 움푹 팬 용암지대에 물이 빠지지 않고 고여 있으면서 생겨난 고요한 습지 위로 시간이 멈춘 듯하다.


(먼물깍)


동백동산을 나와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하늘로 곧게 뻗은 삼나무 길을 달린다. 매일 지나는 1112 도로에 벚꽃이 지고 여린 초록의 잎이 보인다.


저녁, 성산 바닷길의 해녀의 집에서 조개죽과 해삼을 먹으며 해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에 마음을 뺏긴 순간 전화가 왔다. 딸이 저녁 산책을 나갔다 은동이가 목줄을 빼고 뛰어 너무 놀랐고 다행히 동네, 천사 같은 아주머니가 집 문을 열고 은동이를 유인해 겨우 붙잡아 돌아왔다고 했다. 소란을 일으킨 녀석은 밥을 한 그릇 비우고 쿨쿨 자고 있다고 불안한 목소리로 딸이 말했다. 아직도 심장이 떨리다고! 은동이를 도와준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길냥이를 수년째 돌보시는 그분은 오늘 또 한 생명을 구해주셨다. 말썽꾸러기 은동이의 무사귀환을 축하하며 별이 빛나는 밤에 작은 화덕에 불을 피웠다. 바람은 차고 불은 따뜻하고 딸은 4시간째 쿨쿨 잠든 은동이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먹을 것과 물을 주었다. 제주의 또 하루가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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