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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계절에 나는 떠났다. (4월 제주 여덟째날)

2022년 4월 8일

by 은동 누나

어른들도 오래된 친구와 애착 담요가 필요하다.


친구들이 온다. 아침에 식탁에 앉아 글을 쓰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지 속도가 나지 않는다. 3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온 친구들의 오늘은 나와 함께한다. 대평리에서 내가 있는 하도리까지는 차로 1시간 40분!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이동이다. 제주는 생각보다 큰 섬이다.


서울에서도 2달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제주에서 볼 수 있다니 행복하다. 차에서 내리는 친구들은 서울에서 가져온 빵과 과자, 제주 에일 맥주, 그리고 어제의 흔적이 담긴 양주 반 병을 건네주었다. 세화리로 이동하면서 나는 매일 아침에 걷는 숨비소리길에 대해서 말했다. 오늘의 바다는 기분이 좋다.


세화리의 전복 전문음식점에서 아침을 먹고 바닷가의 카페에서 당근주스를 마시고 바다로 나왔다. 옥색 바다가 빛난다. 친구가 소니엔젤 인형을 모래사장에 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분홍 벚꽃을 머리에 매단 작은 인형은 투덜거리지 않고 모델일을 열심히 해 준다. 기특한 모델에게 미역을 감고 모래에 묻고 사진을 찍으며 우리는 웃었다.

(세화리 바다)


바닷가 근처 예쁜 문방구로 향했다. 문방구로 올라가는 계단에 삼색이 고양이가 익숙한 듯 우리를 반긴다. 길냥이를 입양해 키우는 친구가 가방에서 고양이 츄르를 꺼내 내밀었더니 다가와 맛있게 받아먹고 엉덩이를 내밀어 준다. 친구와 나는 궁둥이 팡팡을 해주었다. 소소한 손그림으로 만들어진 예쁜 문구류가 가득하다. 친구는 동생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가게 주인 아가씨는 길냥이들을 돌보다 보니 집에 고양이가 4마리 있고 밖에 있는 삼색이는 가게를 지킨다고 한다. 세화씨문방구의 고양이들은 문방구 물품의 모델이 되어 자기 밥벌이를 한다고 기특하다고 말한다. 주인 아가씨의 마음도 얼굴도 예쁘다.


(세화씨문방구)


세화리를 떠나 마지막 벚꽃이 날리는 1112 도로를 지나 '스누피 가든'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내게 한달살이를 하면서 내가 절대 선택하지 않을 스누피 가든을 가보자고 했다. 천지가 꽃인데 오름이나 길을 걷자는 내게 오늘은 그저 재미있게 웃고 즐기면 된다고 한다. 스누피 가든은 어린이의 놀이터인지 어른의 놀이터인지, 각종 피규어 앞에서 사진을 찍는 어린아이와 어른들로 북적인다. 항상 얄밉지만 설득당하는 루시의 5센트 상담소 앞에서 그들의 명대사를 오랜만에 떠올려본다. 야외정원으로 나와 천천히 산책을 했다. 잘 가꾸어 놓은 꽃들이 한창이다. 팸플릿에 구역별 스탬프를 모아가면 선물을 준다고 했지만 우리는 체력이 다해 포기했다.



스누피 만화를 좋아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라이너스다. 어린 철학자,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애착 담요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라이너스는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으며 찰리 브라운의 고민을 잘 들어준다. 차분하고 현실적이며 냉정하지만 어딘지 외로운 라이너스를 좋아했다. 오늘 나의 친구는 제주 여행의 기념으로 라이너스의 파란 애착 담요를 선물해주겠다며 기념품 가게를 살폈지만 라이너스의 담요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파란 수건을 선물로 받았다.


달디단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하도리로 돌아왔다. 친구들과 별방진 성벽에 올라 이른 석양을 보고 소니엔젤이 아닌 우리의 사진을 찍었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남편과 간단한 인사를 하고 친구들은 오늘의 숙소인 제주시로 떠났다.


나의 친구들!

스무 살 우리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X관 2층에서 장영희 교수의 영작문 수업을 함께 들었다. William Faulkner의 'Rose for Emily'를 읽고 리포트를 썼다. 스무 살의 우리는 졸업을 함께하고 사회인이 되었다. 차례차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아이들이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앞으로도 오래된 친구가 좋다. 파란 애착담요도 파란 수건도 필요하다.


마음 넉넉한 민박집 사장님이 주신 뿔소라와 친구들이 어제 남겨 가져온 술로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꽃도 오름도 산도 아니다. 그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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