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스물한 번째 아침도 숨비소리길을 걸으며 시작한다. 바다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조용하다. 할아버지가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노란 유채꽃이 흔들린다.
'숨비소리'란 해녀들이 물질할 때 깊은 바닷속에서 숨이 차오르면 물밖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이다. 누군가 나에게 왜 여행을 떠나는가 하고 묻는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른다.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고 마침내 여행의 끝에 휘파람을 불어 본다.
평대리에서 비자림로를 지나 거문오름에 차를 주차하니 비가 내린다. 2013년 여름, 제주에서 훈련 중인 아들과 1박 2일 휴가를 보내고 다음날 거문오름에 왔었다. 인솔자를 따라 열심히 걸었지만 마음은 핼쑥하고 힘들어 보였던 이등병 아들의 모습이 가슴 아플 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웠던 여름날, 거문오름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거문오름 탐방안내소에서 예약 명단을 확인하고 출입증을 받았다. 빗줄기가 거세진다. 안내소에서 우비를 사서 입고 12시 30분 출발선에 모여 자연유산 해설사와 인사를 하고 탐방 시 주의사항을 듣고 30명쯤 일행과 함께 출발한다. 출발지에서 오르막길을 걷고 전망대로 가는 250 계단을 올라간다. 비와 안개에 갇힌 삼나무 군락 사이로 계단을 오른다. 해발 456m의 정상이다. 정상을 지나 전망대에서 주변 오름을 볼 수 있지만 안개와 구름이 산을 점령했다.
(거문오름)
(거문오름 정상에서 보이는 오름들)
정상에서 1.5km를 걸어 만나는 안내 초소에서 몇몇 일행이 탐방안내소로 돌아가고 20명쯤 다시 분화구 코스로 출발한다. 억새가 가득한 탐방로를 걸어 곶자왈로 들어간다.
(분화구 코스로 가는 길)
(거문오름 곶자왈)
곶자왈에 들어서자 비가 멈추고 초록의 잎이 반짝인다. 분화구 알오름 전망대와 거문오름 정상1룡을 오르고 일본군 갱도 진지, 숯가마터, 풍혈(숨골), 화산탄, 수직동굴 등을 지난다. 거문오름은 철저하게 관리되어 길을 걷는 도중 쓰레기를 볼 수 없다. 오롯이 숲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봄꽃이 초록의 잎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수직동굴 삼거리에서 분화구 코스가 끝나고 해설사와 일행이 탐방을 마치며 안내소로 돌아갔지만 남편과 나는 태극길 코스로 들어섰다. 태극길 코스는 해설사와 동행하지 않고 걷는다. 분화구 둘레를 오르고 내리며 걷는다. 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선명하다. 거문오름 9룡부터 차례로 걸어가는 중 갑자기 관리인 아저씨가 우리를 부른다. 12시 30분 마지막 탐방 일행이 맞는지 확인하더니 우리가 코스를 끝내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며 뒤에서 우리를 따라온다. 남편과 나는 미안한 마음에 길을 재촉하고 8룡, 7룡, 6룡, 5룡을 지나 삼거리 초소를 지나 안내소로 내려왔다. 조용한 산행을 하려 했지만 결국 산을 뛰어내려왔다.
숙소에 돌아오니 마당 의자 위에 무 세 다발이 놓여있다. 무를 씻어 서걱서걱 베어 물었다. 달고 시원하다. 고양이 사료 그릇을 가득 채우고 물을 갈아주고 작은 화로에 불을 피운다. 나무가 소리를 낸다. 화로 옆에 앉아 하늘을 본다. 검은 고양이가 천천히 다가와 사료를 먹고 돌담 위를 뛰어간다. 제주의 고양이는 돌담을 달린다. 검은 돌담위에 검은 고양이가 달리고 화로의 연기가 잦아들면서 어둠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