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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계절에 나는 떠났다. (4월 제주 열아홉째날)

2022년 4월 19일

by 은동 누나

한라산의 문을 열기는 쉽지 않다.

3년 전 가을, 영실의 가을을 보고 싶어 제주에 도착한 첫날, 단풍 명소 천아 계곡 숲길에서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제주의 정형외과에서 치료를 받고 살살 걸음만 걷다 비행기를 탔다. 2년 전 겨울, 마침 눈이 내린 한라산의 영실을 보고 싶어 영실입구로 향하는데 경찰차가 도로를 막고 스노우체인 장착한 차량만 통과시켰다. 어렵게 스노우체인을 장착하고 영실 관리사무소에서 휴게소까지 2.4km의 눈꽃을 감상하며 도착했더니 12시 5분, 입산통제시간을 5분 넘겨 산행이 불가능했다. 이번 제주 한 달 살기를 계획하면서 영실의 봄을 보고 싶었다. 진달래와 철쭉의 5월까지 기다릴 수 없지만 최대한 늦게 영실코스를 오르기로 했다. 윗세오름을 지나 남벽분기점까지 걷는다.


오늘이다. 햇살이 반짝이는 바닷길을 따라 평대 바다까지 달렸다. 의자도 없는 가게에 사람들이 줄 서 있다. 주먹밥과 당근주스를 포장해 한라산으로 달린다. 1시간 30분을 달려 천왕사를 지나며 분홍색 겹벚꽃이 흩날린다. 천백고지 휴게소를 지나고 초록의 잎이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 사라진다. 영실 관리사무소에서 휴게소까지 2.4km를 걷지 않고 차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 안에서 주먹밥을 먹었다. 영실코스의 춘추절기 입산제한시간은 2시. 우리는 12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탐방로 초입에 산림청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지나 개울을 건너 영실기암을 마주하면서 올라가는 계단으로 오른다. 슬픈 전설의 영실기암을 마주하고 숨을 몰아쉬고 오르니 수직의 바위들이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은 병풍바위를 지난다. 한 시간쯤 계단의 끝에서 뒤를 돌아보면 제주의 오름이 펼쳐지고 앞으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영실 계단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름들)
(병풍바위)
(구상나무와 고사목)

고사목과 구상나무를 지나 족은 윗세오름 전망대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내려오는 길에 갈까 하다 오름 책에서 본 족은 윗세오름에서의 전망을 확인하고 싶어 전망대로 향했다. 거칠 것 없는 들판에 한라산 화구벽과 윗세오름이 펼쳐진다

(족은 윗세오름에서 보는 한라산 화구벽)

멋진 경관을 카메라에 담고 다시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하니 남벽분기점으로 향하는 길에 붉은 줄이 있고 탐방 통제시간을 넘겼다는 표시가 있다. 남벽분기점에서 돈내코 코스로 내려가는 통제시간은 오후 1시 30분.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1시 45분. 남벽이 앞에 있는데 갈 수 없다. 족은 윗세오름을 나중에 올랐다면 하는 후회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히말라야 북벽은 갈 수 없지만 한라산 남벽 아래를 걷고 싶었는데 오늘도 한라산은 문을 닫았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돌아오는 선작지왓 길, 산철쭉이 삐죽 얼굴을 내민다. 5월이면 아름다운 철쭉의 들판이 펼쳐질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입산통제시간이 지나 올라오는 사람이 없다. 다시 구상나무를 지나고 영실의 병풍바위를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왔다.

(영실의 산철쭉)

돌아오는 길, 세화 바다가 열렸다. 썰물 때인가! 먼바다로 걸었다.


남편이 딸의 이름을 바다에 남긴다. 막내 강아지 은동이의 이름도 저녁 햇살에 반짝인다.


2007년 가을, 중 3 아들과 영실 코스를 올랐다. 산도 나무도 귀찮은 아들은 뾰로통한 얼굴로 말없이 계단을 앞서 올랐다. 2013년 여름, 아들은 포항에서 해병대 훈련을 마치고 제주로 자대 배치되어 화순 금모래해변에서 훈련을 하고 완전무장한 채 행군해서 한라산을 올랐다. 제대 후 제주는 쳐다보지도 않겠다던 아들은 이제 서른을 넘기고 다음 달 제주에 온다. 큰 산이 문을 열고 맞이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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