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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계절에 나는 떠났다. (4월 제주 스물다섯째날)

2022년 4월 25일

by 은동 누나


사려니숲에 '안녕!'을 말하다!


오름오름 책에 동글맹이를 남기는 일이 즐겁다. 제주 올레길이 시작되었을 때 올레패스포트에 도장을 꽝꽝 찍으며 설레었던 마음이 다시 일어난다. 오늘의 오름 산책은 붉은오름이다. 화산송이로 된 흙이 유난히 붉다고 이름 붙여진 붉은오름은 자연휴양림과 함께 즐길 수 있다. 1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자연휴양림 입구로 들어가 왼쪽의 붉은오름 등반로로 향한다. 삼나무길에서 시작하는 붉은오름 등반은 계단으로 이어진다. 15분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정상이다. 마사회의 말 목장과 가시리의 오름이 펼쳐진다. 내려오는 길은 반대로 이어진다. 30분쯤 내려오니 다시 삼나무길이다. 남편과 나는 데크에 앉아 곧게 뻗은 삼나무를 바라보며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의 해맞이 숲길을 걸을까 망설이다 근처의 사려니숲길을 걷기로 했다. 입구로 나가는 찰나에 삼나무 사이에 무엇인가 보인다. 노루 세 마리가 뛰어간다. 하얀 궁둥이가 펄쩍 뒤고 사라진다.

(붉은오름에서 만난 노루)


붉은오름에서 나와 보말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사려니숲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사려니숲 입구에 거대한 안내소가 보인다. 말끔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숲으로 들어섰다. 오후 2시를 넘어선 시간 때문인지, 내일 큰 비가 예보된 때문인지 사람이 많지 않다. 하늘은 낮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붉은오름쪽 사려니숲길 입구에서 시작된 길은 높고 빽빽한 삼나무 숲으로 시작한다. 미로 숲길을 지나고 삼나무를 벗어나자 초록의 숲이 펼쳐진다.

(사려니숲길)

빗줄기가 거세지며 초록이 짙어진다. 1시간쯤 걸어 물찻오름 입구를 지난다. 우비를 차에 모셔두고 비를 맞으며 뚜벅뚜벅 걷는다. 사람도 숲도 비를 맞는다.

물찻오름입구를 지나 사려니오름 입구까지 말없이 걸었다. 비가 내리는 오후, 하늘이 내려준 선물처럼 고요한 숲길을 걸었다.



아주 오래전, 물찻오름을 다녀온 친구가 내게 오름을 오르니 백록담 같은 물이 고여있는데 그 주위를 돌아 걷는 길이 너무 멋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오름에 대한 뜻도 몰랐고 그저 멋지다는 물찻오름을 찾아 제주로 왔다. 그런데 물찻오름으로 가는 길에 더 멋진 숲을 걸으며 너무 놀랐다. 사려니 숲이 알려지기 전일까. 그날, 사려니숲을 걷고 물찻오름을 올랐다. 그날 이후 제주에 오면 마지막 날 사려니숲을 걷고 공항으로 갔다. 제주여행의 끝은 언제나 사려니숲이었다. 연둣빛의 봄에도, 짙어가는 초록의 여름도, 빨간 단풍의 가을도 언제나 사려니숲이 좋았다. 그리고 어느 해부터 변심한 연인처럼 사랑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민박집 사장님은 내일 제주에 큰 비가 온다고 말했다.

비 내리는 사려니숲을 걸으며 '안녕'을 말했다. '안녕'이라는 의미는 반가움과 헤어짐과 또 다른 만남의 약속이다. 나는 비에 젖은 사려니숲을 걸으며 여전한 사려니숲에 반가웠고 제주 한 달 살기 여행의 마지막을 오래전처럼 이 길에서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물찻오름과 사려니오름을 오르기 위해 다시 올 것이다.


사려니숲에서 나와 안개가 가득한 1118 도로를 지나 성산으로 내려왔다. 밤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큰 비가 지나고 더 맑고 푸른 바다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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