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낮시간 쇼핑카트를 신나게 밀면서 장을 보다가 '어질'한다. 갑자기 현기증인가? 그 사이, 또 한 번 휘청거렸다. 주변 사람들을 쳐다봤지만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뭔가 분명 이상했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카트에 물건을 담고 있었다. 옆 사람을 붙잡고 좀 전에 지진 아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카트를 세워두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기에 살면서 필요한 앱 중에 하나는 "Earthquake Alert" 지진 경보 앱이다. 지진이라고 느낀 그 시각, 리마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지방에서 지진이 있었고 리마까지 진동으로 잔잔하게 왔구나 깨달았다. '보통 한밤 중에 지진이 나더니, 낮에도 일어나는구나...' 몸은 조금의 흔들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점점 나의 행동이나 생각은 둔해져 갔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하듯 흔들림이 있으니 경고를 주지만 금세 평화로워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흔들린다. 또 흔들린다. '조금 흔들리다 말겠지.' 잠결에 느끼는 진동이다. 잠자는 동안 잠깐 흔들리다 멈추는 것에 익숙해졌다. 곧 멈출 것이다. 낙천적인 성격에 뭐든 금방 적응해 버리는 탓인지, 지진 몇 번 느꼈다고 벌써 안전 불감증인 것 같다. 처음 지진을 느꼈을 때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페루가 불의 고리에 속해 있다고 생난리를 치더니만 이제는 괜찮을 거라며 마음 편히 눈을 감고 고요히 멈추기를 기다렸다. 옆에 자고 있는 남편도 무반응이다.
어? 그런데 다시 흔들린다. 멈출 때가 됐는데? 눈을 감은채 숫자를 세었다.
'일, 이, 삼, 사....'
오 마이 갓. 이번 것은 심상치 않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아이들 빨리 깨워!"
"어떻게야 돼!!!!" 정말 몰랐다.
그동안 리마와 떨어진 도시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에 놀란 적은 많았지만, 진짜 심각한 지진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순서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뒤엉킨 채 소리만 치고 있었다.
책장 위에 있던 액자가 넘어졌다. 아이가 만든 레고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몰라. 일단 밖으로 나가자. 젠장, 우리 집은 6층이다. 잠옷 차림으로 남편은 큰아이를 나는 둘째를 안고 뒷문을 열었다. 이래서 비상계단 연결 문에 열쇠를 꽂아두라고 하는 거구나. 6층에서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멈춘 것 같다. 옆집과 아래층 사람들은 이미 집 밖으로 나온 것인지, 집 안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멈춘 것 같지?" 남편이 말했다.
"응. 아이씨. 무서워."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다시 올라가?"
그야말로 지진을 겪어보지 못한 한국인 부부 둘이서 아이들을 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페루 북부 로레토 지역의 7.5 규모의 강진이었다. 같은 동네에 대피한 집들이 많았다.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뭐지? 한밤중에 메세지를 보내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심을 시켰다. 무지한 우리 부부는 정말 괜찮은 거야?를 확인하고 두 손만 꼭 잡았다.
스페인어 선생님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temblor(진동, 떨림)"와 terremoto(강한 지진)을 구분해 설명해 주신 적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가벼운 흔들림이나 진동을 보통 temblor라고 불렀다. 가벼운 temblor에 둔감해져서 실제 terremoto가 왔을 때 당황했던 것이다. 페루사람들의 조언대로 나는 지진을 대비한 지진 가방을 만들어 문 앞에 두었고, 비상계단과 연결된 문은 항상 열쇠를 꽂아 둔 채로 두었다.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게. 아이들은 학교에서 실제상황이 터진 것처럼 지진훈련을 받는다. 아이들이 나보다 지진대피 요령이 나은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치운 식탁에 평온하게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
샹들리에가 흔들린다. 이것은 terremoto(강진) 인가, temblor(진동, 떨림)인가... 휴대폰 지진경보 앱이 알려준다. 리마와 떨어진 페루 어느 곳에서 4.5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아이들 다녔던 nido(어린이집)다. 지진이 나면 동그란 노란색 "s"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 앞, 거리 곳곳에 "s" 표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