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주재원 사령장을 받고 리마로 떠났다. 회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의 경우 보통 남편들이 먼저 현지 적응을 시작한다. 가족은 비자, 배우자의 회사, 아이들의 학교 일정 등에 맞춰 2~3개월 뒤에 나간다. 나와 아이들은 6월에 출국 예정이었지만 남편의 현지 상황 때문에 예정보다 늦은 8월에 출국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처리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머릿속 가득 페루 생각뿐이었다. 틈나는 대로 페루에서 사는 이야기를 검색했다. 포탈검색의 범위를 남미로 넓혀가며 무엇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남편은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며 주재원의 아내분들의 연락처를 주었다. 사실 혼자 끙끙대며 인터넷을 뒤져보는 것보다 현지에 있는 분들께 1:1 Q&A를 하는 것이 시간과 노력을 줄여주었다. 하지만 카톡을 할 때마다 시차가 정반대인 그분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늘 기저에 깔렸다.
평소 쓰지 않던 다이어리를 꺼내 한국에서 처리해야 할 것과 해외이사 준비로 필요한 것들을 메모해 나갔다. 그 다이어리가 지금 내 손에 없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더 이상 필요 없어졌기에 과감히 버렸다. 브런치 작가가 될 줄 알았다면 버리지 말았어야 할 소중한 것인데, 안타깝다. 경험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한다.
1. 부동산에 집 내놓기
가장 먼저 집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이냐였다. 자가인 경우 전세나 월세를 내놓고, 그 자금으로 다른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오는 분들이 많았다. 전세인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보증금은 적어도 월세를 받는 쪽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파트 월세는 쉽게 나가지 않았고 결국 반전세로 1년 치 월세를 한꺼번에 받는 계약을 했다. 보증금은 친정엄마에게 맡겼다. 엄마는 내가 맡긴 보증금과 엄마의 돈으로 오래 봐두셨던 땅을 사셨고 주재 귀임 4년 반 뒤, 원금+꽤 짭짤한 투자수익으로 돌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대출금을 갚기도 하고, 부동산 하락을 대비해 현금화해 둔 집도 있었다. 또 대출을 받아 집을 한채 더 사두고 왔다고도 들었다. 집 처분으로 생기는 목돈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신중히 고민해 봐야 한다. 주재가 끝날 시점에 부동산 시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장기 해외체류이기 때문에 세입자에게 우리가 국내에 없을 것임을 고지시켜야 한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연락처를 드리고 재계약 시 필요한 일체의 서류와 위임에 관한 내용도 부동산 사장님과 빠짐없이 준비해둬야 한다.
2. 자동차 처분
자동차 명의가 남편으로 되어있어서 차는 남편이 있을 때 미리 팔았다. 대리인인 내가 처리하면 서류가 더 필요했고, 파는 곳까지 차를 갖다 줘야 해서 남편이 있을 때 처리했다. 살 때 중고로 산 차라서 팔아도 가격이 얼마 나오지 않았지만 남편과 나의 첫 차 SM5와 아쉬운 작별이었다. SM5를 보내기 전까지 상처가 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히 몰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예정보다 출국 일정이 계속 미뤄지면서 차 없이 아이들과 지내는데 꽤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운전에 익숙해졌으니, 다음 해외로 나갈 기회가 생긴다면 출국 날짜에 맞춰 처분하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3. 예방접종서류/병원투어
학교 제출 서류용으로 영문 예방접종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시기에 맞게 예방접종을 했는지 확인하고 앞으로 맞추어야 할 예방접종 목록도 확인한다. 서울대학병원에서 황열병 주사도 맞았다. 노란색 증명서를 발급해 줬는데 4년 내내 여권에 계속 껴놓고 다녔다.
둘째 아이가 변비가 심해서 평소 먹었던 변비약을 한꺼번에 많이 처방받았다. 아이들 기관지약, 콧물감기약, 비상약 등을 준비했다. 그런데 4년 동안 살아보니, 타지에서 아픈 것은 타지 약으로 다스리는 것이 효과가 더 좋았다. 세비체(우리나라 회와 비슷한 페루음식)를 먹고 장염에 걸렸을 때도 한국에서 사두었던 비상약을 먹는 것보다 현지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처방받은 약을 먹거나 링거 한번 맞으면 금세 나았다. 모기에 물려도 우리나라 버물리보다 페루 약국에서 산 크림연고가 효과가 더 좋았다.
하지만 치과 치료는 출국 전에 꼭 한국에서 끝내놓는 것이 좋다. 응급으로 치과에 갈 일이 있었는데 비용도 비싸고 페루 치과에서 하는 말을 100% 이해할 수 없어 어려움이 있었다. 나중에는 한인분이 하시는 치과를 찾아 이용했다. 한국 치과의사 선생님께서 임시로 처치를 해 주시고 귀국해 돌아와 치과진료를 끝냈다.
한국이 안경과 렌즈가 구입이 쉽고 빠르기 때문에 미리 여분을 사서 가져가는 것이 좋다. 시력 검사하고 30분 안에 안경 제작이 가능한 우리나라 만세다! 작고 휴대가 편한 물건은 나중에 페루로 오는 출장자가 있을 때 부탁을 드리기도 했다.
4. 4년 동안 볼 아이들 책
주재가 끝나면 아이들은 초등2학년, 3학년이 되기 때문에 5세~10세까지 읽을만한 한국책들과 영어책들을 준비해야 했다. 아이들 연령이 영어도 중요하지만 4년 뒤 돌아왔을 때 한국어 유지를 잘 못하면 돌아와서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중고서점에 갔더니 주재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는지 상담을 아주 잘해주셨다. 유아 아동 전집으로 전래동화, 자연관찰, 수과학, 인성 관련 전집 등 꽤 많은 책을 컨테이너에 실었다. 밤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반복해서 여러 번 읽었지만 새로운 책이 더 필요했다. 2년 뒤 새로 주재원 가족 컨테이너에 사회, 역사, 세계명작, why시리즈, 학습만화 등을 부탁해 받았다.
첫째 아이는 페루에서 영어책과 한글책을 골고루 잘 봐주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 초등 3학년 과정에 적응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학교 쉬는 시간에 외국 친구들을 모아다가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학교 모자에 태극기와 페루 국기를 그려 쓰고 다니기도 했다) 둘째 아이는 똑같이 밤마다 한글책을 읽어주었지만 형 보다 한 살 더 어렸고 한글보다는 영어로 읽고 쓰는 게 빨랐다. 한글은 읽을 수는 있지만 쓰지 못하고 글자를 보고 비슷하게 그렸다. 평소에도 영어책을 선택해 골라봤다. 한글책은 엄마가 밤에 읽어줄 때만 봤다. 초등 2학년으로 돌아왔을 때 영어일기는 쓰지만, 한글은 'ㄱ,ㄴ,ㄷ' 쓰는 순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둘째 아이에게 다시 외국에 나가는 게 어떠냐고 물으면 절대 나가기 싫다고 한다. 혹시 페루에서 나 모르게 힘들었나? 했던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한국어 다 까먹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 외국 나가면 한국어 또 다 까먹을 거고, 돌아오면 다시 한국어 하느라 엄청 힘들 거란 말이야" 우리가 평생 외국에서 사는 건 아닌 것을 알기에 아이는 벌써 돌아올 것을 걱정하는구나, 외국에서 사는 걱정보다 한국어를 잊어버릴까 봐 싫었던 것이다. 한국에 와서 옆에 앉은 친구들처럼 똑같이 읽고 쓰려고 내 생각보다 더 힘들었나 보다. 밤마다 한국어 책을 읽어주지 않았다면 귀국 후 적응은 이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한국어 책을 읽을 수는 있는 수준에서 시작한 것에 감사해야 했다.
영어책은 한국에서 사갔지만 학교 도서관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실제로 한국에서 산 원서들은 많이 보지 않았다. 학교 도서관에 재미있고 좋은 책들이 정말 많았다. 도서관 환경도 시스템도 잘 되어있다. 페루 국제학교에서 깔깔대고 즐겨봤던 원서들이 한국에 돌아와 보니 리딩 단계별 추천도서로 빠짐없이 나와 있는 것을 봤다. 아이 나이에 따라 모국어와 영어의 집중도 비중을 적절히 해야겠지만, 비중 선택에 따라 장단점은 분명히 있다.
5. 해외이사준비
크게 네 가지로 고민해야 한다. 가져가야 할 것, 버릴 것, 부모님 집에 맡길 것 , 새로 살 것.
해외이사 업체가 친절하고 자세히 도와준다. 우리가 갈 때는 컨테이너에 20피트까지 싣을 수 있었다. 국가별로 해외통관이 가능한 물건과 가져갈 수 없는 것까지 담당자와 연락을 하며 준비할 수 있다. 필요한 서류까지 꼼꼼히 처리가 되기 때문에 이사 업체를 믿고 진행하면 된다. 나의 경우 요리에 필요한 고추장, 된장, 간장, 매실등 장류를 어느 정도까지 붙일 수 있는지가 궁금했는데, 이사업체가 선정되고 담당자가 시키는 대로 뜯지 않은 새 제품만 적당히 싣었고 문제가 없었다.
잘 열어보지는 않지만 가져가기에는 애매하고 버리기에는 소중한 것들을 분류해 부모님 집에 맡겼다. 결혼/가족/졸업 앨범과 액자, 아이들 돌반지, 귀중품, 도장, 신분증, 각종 서류와 문서 그리고 추억이 담긴 물건들 (편지, 카드, 과거 성적표등)은 박스에 잘 담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리스트를 적어 붙인 후 한국에 두고 갔다. 요즘은 휴대폰에 사진이 다 있지만, 학교 수업 중 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과 가족사진을 가져오라는 경우가 있다. 앨범은 챙겨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리마의 겨울은 매우 습하고 서늘하다. 두꺼운 패딩과 코트까지 입어본 적이 없지만 바닷가에 나가거나 밤에는 꽤 춥다. 제일 두껍게 입은 옷은 경량패딩 정도이다. 집에 보일러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기요는 필수다. 부부와 아이들이 쓸 전기요가 각각 필요했기 때문에 3개를 가져갔다. 집안 공기가 차가워서 현지에서 라지에이터, 전기난로, 온풍기를 사서 틀었다. 특히 목욕할 때 미리 따뜻하게 해 놓아야 옷을 입을 때 덜 춥다. 한여름을 제외하고 리마는 상당히 습하다. 한국에서 제습기를 2개를 사서 갔다. 가죽 재질의 옷이나 가방, 평소 잘 신지 않는 신발에 하얀 곰팡이가 핀다. 신발마다 신문지를 뭉쳐 넣어두고 서랍장에 종이를 깔고 옷을 넣었다. 욕실 근처 벽지(페인트)는 습해서 뜯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틈틈이 옷장, 방, 목욕 후 화장실에 제습기를 꼭 틀어줘야 한다. 몇 시간 만에 제습기에 물이 가득 찬다.
집의 크기가 달라지고 아이들이 커 가기 때문에 필요한 가구를 샀다. 리바트 상설매장에서 흠집 난 제품을 싸게 샀다. 책이 많아질 것이니 책장, 아이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 손님 초대가 많을 테니 6인용 식탁과 벤치 의자(8인용을 샀어야 했는데 후회했다. 아이친구, 동료, 지인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이 많다), 이층 침대. 구하는 집에 따라 가전과 가구가 다 들어가 있는 집들도 있다. 현지에서 구하는 집에 따라 가구와 가전을 살 것인지, 빌려 쓸 것인지 정하면 된다. 우리의 경우 빌트인 옷장과 수납장 말고는 소파, 식탁등가구가 없는 집이었기 때문에 평수에 맞게 몇 가지 사야 했다. 페루에 가구매장, 쇼핑몰, 백화점에 예쁘고 멋있는 가구도 많다. 다른 사람들은 현지 분위기에 맞게 예쁘고 특이한 소파와 가구를 사서 집을 꾸민 집들도 많다. 하지만 예쁘면 틀림없이 비쌌다.
6. 보험/인터넷/휴대폰 유지 및 해지
TV, 인터넷, 정수기, 휴대폰, 보험 등 약정 계약했던 것들을 처리해야 했다. 언제까지 쓸 건지 날짜를 정하고 컨테이너 이사 날짜에 맞게 해지 또는 양도를 했다. 해외장기체류 사유로 인정해 준 곳도 있고, 개인 사정이기 때문에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 경우 양도를 해서 위약금 문제를 해결했다.
휴대폰은 4년 동안 유지 비용이 아까워서 해지하고 왔는데 금융 관련 업무를 볼 때 인증받을 일들이 많아서 너무 불편했다. 결국 한국에 갈 있을 때 최저요금으로 개통했다. 보험도 계속 유지했다. 의외로 한국에 나올 일이 많았다. 주재하는 동안 아이가 아파서 귀국해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 한 적도 있었다.
이사 준비는 어때? 잘 되고 있어? 혼자 고생시켜서 미안하네. 나도 여기서 가족도 없이 불쌍하다고, 오늘은 00주재원이 저녁 초대해 주셔서 저녁 먹었어.
나는 나대로 한국을 정리하느라 바빴고, 남편은 혼자 가족이 오기만을 기다리느라 외로웠다. 페루의 한인 비율은 대국과 비교해 확실히 적었다. 그래서 몇 안 되는 한국 사람들끼리 금방 가까워지고 가족들끼리 서로를 챙겨주는 일이 많았다. 내가 갈 때 선배 주배원 엄마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나 또한 후임 가족의 주재정착이 어렵지 않도록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