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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벌레 잠잠이 Sep 25. 2021

선물 같은 가을 오후에,

느릿느릿 걸었다

 점심도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어서 빵과 커피로 간단히 때우고 서둘렀다. 잠도 거의 못 자고 일정이 빡빡했던 날, 그래도 사무실에 가져갈 호두과자를 사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회사에서 온 전화, 급한 사정이 생겨서 다음으로 오늘 계획된 일을 미루자는 연락이었다. 별일 아니기를 바라면서 나는 호두과자와 커피만 사무실에 놓고 나왔다.

추석 전날 시장 가면서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왜 오늘은 사진을 안 찍었을까나.

  갑자기 몇 시간이 생긴 것이다.

 하늘은 파랗게 높았고 구름은 둥실둥실 떠 나니는 가을 오후, 마음이 넉넉해졌다.


 사무실에 가서 마시려던 커피를 다시 카페에 들어가서 마시며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따뜻한 카페라테를 설탕도 넣지 않고(항상 넣는데 오늘따라 가루 설탕이 없다고 해서__) 마시는데도 달았다.

 브런치에 올라온 여러 글들을 읽으며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겼다.

이 커피는 작년엔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마시던 카페라떼. 오늘은 테이크 아웃했다가 다시 들어가서 종이컵에 커피를 마셨다.

어쩌면 이렇게 솔직하게 글을 쓸까,

어쩌면 이렇게 유쾌하게 표현을 할까,

어쩌면 이렇게 실화도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그려낼까.

감탄을 하고 감동을 하며 찬찬히 작품들을 음미했다.


 카페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선물처럼 주어진 시간에 다시 한번 설렜다.


  전철역에 내려서  근처 대형서점에 갈까, 친정어머님께서 갖고 싶다고 하신 국화꽃을 직접 꽃집에 가서 알아볼까.

이번 명절에 사려고 했다가 못 샀던 것들을 가서 살까.


 버스 창가에 앉아 초록의 나무들을 보며 행복한 고민에 잠겼다.

추석명절 연휴때 남편이 찍은 사진이다.

 그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친정부모님을 좀 더 여유 있게, 정성껏 챙겨드렸어야 했다는.


 고관절 수술 후 재활치료 중이신 아버지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잠깐 퇴원을 하셨다. 그 사이 다음 항암치료 관련해서 다른 병원의 주치의 면담과 검사 등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아직은 혼자 걸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풀타임으로 요양보호사를 부탁했는데 갑자기 몸이 아파서 못 온다는 연락이 전날 밤늦게 온 것이다.


 어머니는 주로 이용하시는 요양보호사 센터에 다시 부탁을 하셨지만 갑자기 다음날 새로운 요양보호사를 배정받기란 쉽지 않았다. 나도 그전에 상담하고 통화한 적이 있는 다른 방문요양 파견센터에 여러 곳에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하며 알아봤지만 결국 어제는 아무도 오지 못했다.


 오전에 부랴부랴 급한 일들을 끝내고 잠도 못 잔 좀비가 되어 친정집에 갔다. 아버지는 그 사이 더 앙상해진 다리로 휠체어에 앉아 서재에서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계셨다.

 

 다른 가족들은 투병 중이신 아버지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을 말리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모습이 숭고해 보인다.


  아프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많은 알약과 연하제 없이는 마실 수 없는 물, 때때로 찾아오는 통증에 잠식되어 우울감에 빠져있는 것보다는 아버지처럼 일상을 담담히 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암이 재발하고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한 데다 고관절 수술까지 받는 무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다시 호흡기에도 문제가 생겨서 죽을 드신다.


 그랬기에 내가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따뜻한 죽을 배달 시켜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정년퇴직 후에도 등산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셨던 강인한 아버지는 병색이 완연하고 항상 긍정적이고 미소가 떠나지 않는 현명한 어머니의 얼굴은 긴장 상태로 경직되어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어머니께서 부탁하신 서류를 떼러 주민센터에 가고 아버지가 등기로 보내셔야 할 서류를 갖고 우체국에 갔다 오니 저녁때가 다 되었다.


 나는 저녁 식사만 챙겨드리고 다음날인 오늘 일정이 바빠서 집으로 오려고 했다가 식사를 못하시는 어머니를 보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서 어머니와 함께 먹고 차를 마시고 다시 뒷정리까지 다 하고 나니 밖이 어두컴컴하다.


 그 사이 다음날부터 예전에 오셨던 요양보호사분이 오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물에 젖은 빨래처럼 늘어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는 어제대로 최대한 시간을 내서 부모님께서 부탁하신 일들을 처리해드리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예상치 못한 몇 시간이 생기자 어제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된장찌개를 새로 끓이거나 수제비를 만들어서 좀 더 정성 어린 시간을 함께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오는 것이다.


 어머니와는 영화 보러도 자주 다녔고 아버지도 때때로 함께 외식하는 재미에 극장 가는 길에 따라나서곤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는 언감생심이고 외식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저 지금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지만 두 분을 만나고 오는 길은 늘 마음이 무겁다.


 

 그렇게 선물 같은 시간이 생겼다고 자유를 만끽할 것 같았지만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6시가 다 되어간다.


 내 마음과 달리 내 몸은 아직 녹초였고 좀비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다.

명절 때 답하지 못한 안부인사에 답장을 보내긴 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 잠깐 만나자며 연락 좀 달라던 지인과의 약속은 미뤄야 했다.


 그래도 늘 서둘러 성큼성큼 걸어서 집에 오는 길, 느릿느릿 걸으며 하늘도 보고 주변의 달라진 풍경들도 보며 해찰하듯 그렇게 돌아왔다.


무사히 또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이 사진은 추석 전날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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