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달곰하고 때로는 쌉쌀한 레시피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읽고

by 책벌레 잠잠이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길에 어느 집에선가 새어 나오는 된장찌개 냄새는 나를 무장 해제시킨다. 그것은 내게는 평화의 냄새다. 누군가를 위해 종종걸음으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가족을 위해 감자를 뚝뚝 썰어 넣고 나박나박 썬 호박을 넣은 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며 저녁상을 준비하는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그 풍경 속에는 나의 엄마가 있다.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따뜻한 식사가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즐거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도 엄마가 되어서다.


엄마의 자리에 있지만 여전히 딸이고 싶은 내게 <딸에게 주는 레시피>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자신의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그에 걸맞은 요리 레시피를 알려주며 나지막하게 들려준다. 때로 딸의 입장에서, 때로는 엄마의 처지가 되어 나는 그 말들을 꼭꼭 씹어가며 읽었다.


내게 가을 저녁은 늘 그 차가움보다는 어둠으로 다가왔어./
전과 같은 시간에 길거리를 나서는데도 낮이 성큼성큼 멀어지고 먹빛 어둠이 덮쳐올 때,
갑자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서둘러지고 그럴 때, ‘가끔 나는 엄마 없는 아이 같아요’라는 노래를 들었단다.


나 역시 일을 하고 퇴근을 할 때나 그냥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누군가 환하게 불을 밝혀놓고 고슬고슬 밥을 하고 두부를 큼직하게 썰어놓은 된장찌개를 끓여놓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쩌면 나의 엄마도 이런 가을 저녁이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가을이 깊어간다.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날들이 남아 있을지, 네게 얼마나 많은 날들이 있을지 우리는 사실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지.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거.
이 순간을 우물우물 보내며 인생이 그렇게 허망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거.


그러고 보니 나의 엄마는 서른이 넘어서도 결혼할 생각도 없이 일만 하던 딸이 실직을 했던 어느 해, “당분간 내가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공지영 작가의 말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밥그릇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터였는데도 엄마의 그 말은 든든했다.


예상치 못한 실직을 했던 날 저녁 엄마는 늘 그렇듯
콩과 현미, 보리가 넣은 밥을 새로 짓고 김치찌개를 끓여주셨다.
멸치만 넣고 푹 우려내서 끓이는 담박한 김치찌개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였다.


그날 엄마가 어떤 말을 해주었는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말들이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하지만 그토록 좋아했던 김치찌개가 참 맛없게 느껴졌던 날도 잊을 수 없다. 결혼을 하고 두 딸을 낳은 후 회사에 복직하던 날, 나는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회사로 출근한 첫날,
나는 팀장이 설명한 상황과는
다른 싸늘한 분위기를 느꼈다.
함께 일을 하게 된 책임자는
노골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내 책상은 있었으나 일이 없었다.


오전 내내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허드렛일이라도 도우려고 했지만 누구도 선뜻 틈을 내주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책임자가 와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는 말에 나는 따뜻한 찌개를 먹자고 했고 그는 회사 근처에 유명하다는 김치찌개 전문집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김치찌개가 나오기가 무섭게 그가 말했다. “같이 일하기 어려우니 먼저 못하겠다고 말해 달라”라고. 나는 얼굴을 마주하고 거절의 말을 들은 게 처음이었다. 일을 할 때나 심지어 연애를 할 때조차 면전에서 이렇게 단호한 거절을 한 적도, 당한 적도 없었다.


매콤하고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던 김치찌개를 보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도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묵묵히 먹으며 생각했다. 멋지게 거절에 응하고 박차고 일어설 것인가, 다 먹고 정중하게 돌아설 것인가. 그런데 나는 그 넘어가지 않는 김치찌개를 꾸역꾸역 먹고 “기회를 달라”라고 그에게 말했다. 자존심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갑자기 모든 가능성의 문이 닫히고
영원히 세상의 불빛 밖으로 쫓겨난 것 같은 날’이라는
글을 읽는 순간 울컥했다.


어쩌면 너를 괴롭히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그 일들, 그 단어, 그 눈빛이 떠오를지도 몰라.
아프겠지만 그것을 잡아라.
얼핏 가시투성이로 보이는 그 껍질 속에 실은 성장의 열매가 있다는 것을 말이야.


더불어 저자가‘자존심이 깎이는 날 먹는 안심 스테이크’ 레시피를 소개하는 장을 읽으면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다. 자존심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나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 물러서지 않았기에 나는 경력을 쌓았고 이제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된 우리에게는 이제 두 가지 임무가 있다. 곧, 가는 것과 되는 것이다.
성숙을 위한 첫 번째 임무는 도전, 공포, 위험 그리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는 것이다.
두 번째 임무는 그것에 대해 인정을 받건 그렇지 않건 간에 단호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훗날 나도 내 딸들에게 나만의 레시피를 들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꼰대스러운 권위적인 조언이나 틀에 박힌 잔소리가 아닌!
달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쌉쌀하기도 한
내가 살아온 인생의 레시피를 담아서
솔직하고 담담하게 전해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사랑한다. 이 불공평하고 힘겨운 인생에서 그래도 우리가 이 불공평과 힘겨움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오늘도 좋은 밤.




책 제목: 딸에게 주는 레시피

작가: 공지영

출판사: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