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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베준 Oct 30. 2024

고비의 순간은 언제나 찾아온다.

퇴사해? 말아?


불길한 느낌은 늘 맞는 편이다.



꼼지락꼼지락 자꾸 깨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뜨겁다. 믿고 싶지 않은 듯 차례대로 몸을 구석구석 만져보지만 엄마의 직감은 늘 맞는다.

이쯤이면 대략 38.6도

체온계로 재보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는 온도.

새벽 2시 30분. 묵직한 눈꺼풀을 비비며 더듬더듬 해열패치와 해열제를 찾아본다. 해열제를 먹이고 열이 떨어지는지 지켜보며 졸린 눈을 감고 쪽잠을 청해 본다.




"예준이가 열이 나.  병원 가야 할 거 같은데?"

"나 오늘은 바빠서 안되는데...."



남편과 둘 중 연차를 내야 한다면 거의 내가 되고 만다. 남편은 무슨 바쁘고 중요한 일이 그리도 많던가? 누군 되나? 나는 눈치 안 보이나? 같은 직장인이기에 충분히 이해하지만 늘 나만 연차를 쓴다는 생각에 툴툴거리게 된다. 일단 병원 문 열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 서둘러 준비를 해본다. 평일이어도 소아과의 아침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룬다. 엄마들은 반은 의사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열이 나면 병명은 대략 짐작이 되고 엄마나이 9세 경력의 내 촉은 거의 적중한다. 병원에 가는 마음이 무겁거나, 덜 무거울 때가 있는 건 무서운 엄마촉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에요? 입안이 뻘개요. 구내염이에요."

목이 아프다고 할 때 설마 했는데, 손발은 멀쩡하기에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열이 심상치 안아 어느 정도 짐작은 했던 터.  우리 집 아이들은 유행에 선두주자이다. 요새 수족구가 많이 돈다고 유치원 공지가 뜨자마자 일어난 일이다. 계절마다 유행에 앞서나가느라 너희들도 참 힘이 들겠다.

열이 떨어지지 않거나, 전염성 있는 이런 병명이면 며칠 동안 등원하지 못하니, 이 며칠의 기간을 또 어떻게 버텨야 하나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이가 아플 때마다, 늘 고비가 온다. 나만 그렇진 않을 터. 워킹맘이라면 아이가 아플 때마다 모두가 겪고 있는 발 동동 구르는 일상들이 아니겠는가. 직장에서의 눈치와 쌓여있는 일들이 맞물리며 나의 스트레스 지수는 적색경고이다. 나의 개인적 상황과는 별개로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은 쌓여있으니까. 빼고 싶지 않던 아껴두었던 연차는 깎여가고, 잦은 휴가로 직장에서 눈치는 덤이다. 좀 뻔뻔한 아줌마이면 좋겠지만, 이상하게 직장에서 만큼은 그런 아줌마이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나 엄마예요 티 내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  며칠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복잡 미묘한 마음과 얽힌 생각들이 나를 갉아먹어 힘이 없어진다.



아.. 퇴사하고 싶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하는 말이다.

'아이가 매일 아프진 않으니까. 그냥 또 버티면 지나가겠지' 무의식을 의식으로 돌려본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드냐고 묻는다면, 아이가 아플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한다는 것, 그 아픈 아이를 두고 일하러 나와 종일 아이상태를 묻고, 확인해야 한다. 미안함이 이렇게 큰 감정일 줄이야.

엄마 언제 와? 보고 싶어라는 아이의 전화에 마음이 무너진다는 것. 아프다고 징징 거리는 너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자꾸 전화하는 너에게 퇴근하고 간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무거운 마음에 일은 집중이 되지 않고 유난히 키보드 소리만 더 크게 들린다.





다행인 것은, 친정이 가까이에 살고 있어 아플 때마다 맡길 수 있으나,  사실 이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다.

몸이 불편하신 아빠와 가장일을 도맡아 일을 하시는 친정엄마가 일까지 못하시며 봐주실 때도 있는데 그때 그 죄스러운 마음이란. 평소 나 살기 바빠 내 자식 챙기느라 가까이 살아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인데 이렇게 필요할 때만 맡기고 도움만 받는 것 같아 죄송함도 동시에 밀려온다.


늘 고비의 순간은 찾아왔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시간은 흘러간다.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고 무탈 없는 감사한 일상들을 지내다 또 한 번씩 고비라는 무거운 그 녀석이 찾아와 휩쓸며 무한 반복하며 이렇게 버틴 9년의 세월이지만 이제는 아이가 아플 때의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초등학생 아이의 방학


방학엔 지긋지긋한 죄책감이 2배로 늘어난다. 학교 돌봄을 보내려면 도시락을 매일 싸야 하고, 간식도 챙겨야 한다. 힘들어도 그쯤이야 싶지만 무엇보다 아이가 다른 친구들은 다 방학인데 학교를 가고 싶지 않아 할머니집에 가있게 된다. 오후엔 학원을 가지만, 오전의 그 황금 같은 그 시간들을 내가 챙겨주지 못한다는 죄책감.

할머니 집에만 가면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 노력한다고 하는데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매일 아이와 전쟁이 되는 방학기간은 내 성에 차지 않는 아이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거겠지. 무조건 티브이 보며 놀기만 하고 싶어 하는 아이와 할 일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하루하루 타협하지 못하고 겪는 이 불편한 갈등에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그렇게 힘든 1년을 보내고 차차 아이와 나의 속도에 맞게 일상생활과 방학기간에도 타협하며 루틴을 잡아가고, 서로 양보와 많은 대화로 적응해 나가고 있는 요즘은

'아이 옆에 같이 있었더라면.'

이 끔찍한 죄책감의 무게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워킹맘들은 퇴사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제일 많이 한다고 언젠가 동료와 얘길 나눈 적이 있다. 나 역시 그러겠지 생각했던 그때에는 지금까지 이렇게 잘 다니고 있을 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우여곡절이 많음에도 쉽게 끊을 놓지 못하는 직장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면서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 현실.

계속 다니면서도 이게 맞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관둬야 하나? 관두면 내가 아이들에게 죄책감만큼 잘해줄 수 있을까? 내면과의 타협은 사실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의 이 모진 죄책감들은, 어쩌면 완벽한 엄마를 꿈꾸고 있는 허상 때문에 현실의 괴로움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워킹맘에게 죄책감이란 끝나지 않을 긴 레이스일지도 모르겠다.




'잘하고 있어.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잖아. 사회에서 맡은 몫을 최선을 다해가며 살아가고,

아이들은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어. 잘 해내고 있는 모습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주고 있어. 그것만으로 된 거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 무거운 죄책감이 아니라, 엄마의 따뜻한 시선과 사랑임을.

퇴근길, 막히는 도로.

일련의 빨간 불빛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초초해진다.


"서준, 잘 다녀왔어? 엄마 출발해. 조금 이따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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