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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l 01. 2019

처음으로 시집 산 날

혜화동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을 가다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면서 시집이 일고여덟 권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사람들은 내가 시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종종 시집을 선물 받곤 했다.


잘생긴 얼굴을 두고 백석이 좋다고 말하자 누군가는 수없이 읽은 귀한 백석 시집을 주셨고ㅡ 외울 수 있는 거라곤 서시 한 편밖에 안 되면서 윤동주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또 누군가는 동시가 수록된 윤동주 시집을 주었다. 김선우, 김소연, 도종환, 정호승, 김용택, 류시화... 시집을 보면 시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집을 선물해준 사람들이 기억난다. .




부끄럽게도 나는 시집을 한 번도 (내 손으로 골라서) 산 적이 없다. 나는 시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나에게 시집을 선물할까.


그 마음 알고 싶어서 ㅡ


나는 내게 시집을 선물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 시집을 사러 갔다. 항상 혜화동 들러야지 (혜화떡집 가야지?) 하고 있다가, 마침 위트앤시니컬 3주년이란 소식을 듣고 기필코 가야만 했다.


'위트앤시니컬'은 혜화로터리 동양서림 2층에 있는 시집 전문 서점이다.



시집을 고른다는 것


글쎄. 시집을 고르는 건 다른 책을 고르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오로지 제목만 가지고 느낌이 오는 시집을 집어 들게 된다. 디자인 같은 건 볼 여유도 없었다. 한 단어 말 또는 기껏해야 한 문장밖에 되지 않는 제목들이지만 그 속엔 말하지 못한 열 마디 말들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함축적인 시집 제목을 주욱 훓어보고 나니, 마치 몇 편의 시를 읽은 것만 같다.





위트앤시니컬 주인장 유희경 시인은 너무 친절하셨다. 시집을 골라주려고 하셨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친절함이 난 너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추천의 말이 있는 하재연 시집을 펼쳐보지도 않고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편하게 읽힐 것이라는 '우주적인 안녕'을 추천해 주셨는데 너무 단호하게 거절한 것 같아서 죄송하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안녕'이란 말에 욱해서 그만...



3주년 기념이라고 생일 떡도 받았다. 사실 이 떡이 먹고 싶었다. (덕분에 혜화 떡집은 생락..) 축하도 제대로 못 해 드렸는데 너무 맛있더라. 우주적인 안녕까지 네 권 다 살 걸 그랬나. 나같이 시집을 처음 사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서 서점이 더욱 잘됐으면 좋겠다.


나는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내내 시를 읽으면서 왔다.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시를 읽는다는 건ㅡ 이하 생략.




소설, 그다음엔 '시'인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읽고 싶은 걸 읽는다. 나의 요즘은 뭔가 불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하고 싶은 걸 한다는 게 그보다 더 '만족'스러운 게 또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다시 만족스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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