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소설,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를 읽고
결정적인 순간에 다가오는, 아니 찾게 되는 ‘신’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막다른 길, 더 이상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느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어떻게든 흘러가고 보이지 않는 순리의 손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 일 것이다. 소설 속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움직일 수조차 없이 우두커니 서서 한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을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을 떠올린다.
주인공은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평소에 신을 믿지 않는 나에게도 무척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처럼 들렸다. 신은 심판장처럼 그들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파헤치고 싶어서, 소설 속 그들이 어떤 심판대에 올라와 있는지 반추해 보고 싶었다.
세영의 세계
이 소설은 세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었다. 그의 남편 무원의 이야기가 2부를 구성하지만 3부에서 다시 세영으로 돌아오므로 사실상 주인공은 세영이라 할 수 있다. 무원은 세영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어찌 보면 세영을 이루는 한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무원이라는 존재는 세영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속 빈 강정이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로써 기능하는 것 같았다.
세영의 세계란 어떤 곳인가. 아파트라는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어떤 집단을 형성하는 도시 공동체다. 이곳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세영은 이웃들에게 어떤 폐도 끼치지 않고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사람들과의 교류에 소극적이다. 하지만 그런 세영과 달리 무원은 좀 다른 의미에서 적극적이다. ‘재건축추진예비위원회 모임’에서 간부로 선출되며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세영의 세계가 피상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무원은 재산가치의 상향을 노리는 아파트 공동체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원은 세영의 세계에서 좀 더 자본주의적 욕망의 이빨을 드러낸 모습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가 소원해 서로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두 사람이었지만, 일상의 패턴을 항상 똑같이 유지하는 세영이나 자신이 경영하는 숙박업소의 교통체증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무원이나, 현상유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면에서 둘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세영은 학부모회에 무원이 대신 참석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하고 무원은 세영이 자신인 척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해줬으면 하는 상상을 하는 등 현재 자신에게 닥친 일을 상대에게 떠넘기고 싶은, 마치 그래도 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한 사람이 서로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원의 이야기를 흡수하여 세영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했다.
세계를 무너뜨린 죽음
세영은 얼핏 보면 양심적이고 도를 넘지 않는 인물처럼 보인다. 마치 아파트 주차장 선 안에 잘 주차된 차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약국은 자연스레 이웃들 간에 남 이야기를 하는 ‘소문의 허브’가 될 수도 있었지만 함께 이야기를 덧붙이기보단 묵묵부답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그가 선을 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행동거지를 분명히 하는 것은 타인의 위해뿐만 아니라 타인의 관심도 타인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관심도 모두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던 세영이 한 사건으로 인해 지속해온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유강이란 아이의 죽음 때문이다.
유강은 세영의 딸 도우의 같은 반 전학생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세영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수, 은석이가 가해자로 지목된 학교폭력 사건의 피해자였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 학부모 대표로 참석해야 하는 세영은 무척 피로감을 느낀다. 바쁜 일상에 또 다른 일이 끼어 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남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세영의 성격으로 본다면 충분히 그럴듯한 전개였지만 오지랖이 넓어 고민인 나로선 세영이란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세영은 지수 어머니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 뿐이다. 그녀에게 별다른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서로의 자녀를 매개로 얼굴을 알고 간간히 마주친다는 사실만으로 ‘아는 사람’이라는 단단한 테두리가 형성되고 말았던 걸까. 반면에 유강의 할아버지는 아파트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며 새벽 다섯 시 반에 긴 장문의 메시지를 여럿 보내는 걸 보고 ‘과연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까’라며 그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세영은 아는 사람의 테두리 안에 있는 이들의 면전에서 모진 결정을 하지 않으려 결국 학폭위에 불참하고 만다. 세영의 불참이 가해학생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데 일조하고 이날 이후 유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파트 화단에서 발견된다.
잘못, 그리고 죄책감
사실 유강의 죽음 그 자체는 세영에게는 모르는 게 좋았을 일, 그저 지나가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영은 자기의 생일날 자살을 떠올린 인물로, 죽음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거나 죽음의 결과로 슬픔을 필연적으로 동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장례식장에 가려는 딸을 보고 세영은 나중에 가는 게 좋겠다는 비겁한 말들을 늘어놓았고, 도우는 “나중에…… 언제요? 엄마, 시간이 없어요.”라고 현실을 직시하는 말을 한다. 이때까지도 세영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딸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하면서 그제야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렇다. 아마도 이때 세영은 아직 아니라며 언제고 행동을 유예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늦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나마 세영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신호등 빨간불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과연 마지막 문장까지 도달한다면, 그때라면 세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세영은 장례식장에 있는 도우를 집에 데리고 가려했지만 도우는 일어서지 않았다. “우리가 가 버리면 아무도 없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영은 ‘뜨끈한 감정이 솟구’치며 주저앉아 오래오래 울고 싶어져 버린다. 아무도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고 그전부터 아무도 학교폭력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세영의 무관심을 비롯하여 모두가 쉬쉬하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랐지만, 실상 이미 눈덩이처럼 커져 버린 문제 앞에서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았던 ‘부작위’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세영이 느끼는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부작위의 심판
이 소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어떤 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죄’는 속세의 법으로 그것을 벌할 수 없고 주인공들 또한 자신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아무 행위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는데. 그들은 마치 무언가 잘못했으며 자신이 벌을 받을 것이란 예감에 떨고 있었다.
사실 난 어느새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있었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 당신에게 그것이 과연 최선이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언제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당신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최선의 무기라도 되는 양 몸을 움츠렸다. 아는 사람의 범위 내 선의를 가장한 무위를 베푸는 것이 사회적 선의를 직접 행하는 것보다 우선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똑 부러지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따져 묻고 싶은 ‘당신’은 세영을 말하는 것인지 소설 속 다른 학부형, 주민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설을 두 번째 읽고 나서 주룩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차오르며 동시에 명치를 밀어내리는 눈물의 무게감은 무언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무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던 나는 짭짤한 눈물을 맛보며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저질렀던 무수한 잘못들을 뉘우치고 싶었다. 작게는 아파트 이웃에게 복도에 어지럽혀진 유리창을 치우라는 소리를 하지 못 하고, 자주 버스에 올라타는 거지 아저씨에게 불편함을 느껴 누군가 쫓아내 주길 바라고, 멀리서 산불이 나도 외면했던 나. 오직 내 가족만 무탈하면 되고 동정심조차 베풀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한결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저지른 잘못들이었다.
소설 속 세영처럼, 어떤 소리가 몰려오는 듯했다. 우리의 마음에는 양심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양심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의 소리다. 우리가 타임에게 무관심하고 선의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죄를 짓고 벌을 받는다. 나는 소설이 내려다 준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을 찾아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신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