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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20. 2021

엄마 아빠는 똑같은 아바타

 

아빠의 취미생활은 그다지 특별한 게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TV 시청...? 친구들이랑 술...?


엄마는 이런 아빠를 내심 걱정하셨고,


두 분이서 함께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를 가지셨으면 하고 바랐다.


아빠도 조금 생각이 바뀌셨는지, 언제부턴가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건설적인 취미를 찾으시려고 애쓰시는 게 보였다.


그래서 옛날엔 등산, 요즘은 골프,


친구들 부부동반 모임에 끼여 꽤나 의식적으로 노력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꼭 약속하지 않아도 두 분이 마음이 맞는 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엄마와 아빠의 취미생활이 일치하는 바람에,


난 이것이 모처럼 두 분의 '천생연분 썰'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비밀스러운 취미생활


"왜 전화했는데~?"


내가 오랜만에 전화드린 것치곤 엄마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그냥 별일 없는가 해서요. 아빠는 별일 없으세요?"


"어~ 어... 너도 별일 없제?" 


엄마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물어보시는 듯했다. 


"그래~ 그러면... 엄마가 이따 전화할게... (딸깍)" 


엄마께서 전화를 끊으려고 부릉부릉 시동을 거시더니,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느낌이 왔다.


"엄마! 지금 바둑 하세요?"


"어~ 어떻게 알았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엄마의 모습이 상상이 갔다. 저녁인 지금쯤, 아마도 엄마는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스탠드를 켜고 앉아계실 것이다. 그리고 한 손으론 휴대폰을, 다른 한 손으론 마우스를 (딸깍)거리고 계시겠지. 엄마의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서는... 커다란 바둑판과 흰색 검은색 바둑알이 어지러이 엄마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을 것이다.


이놈의 딸은 평소에 전화도 안 하면서 꼭 이럴 때 전화하더라,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 얼른 전화를 끊어드렸다. 문득 웃음이 났다. 오늘은 아빠가 집에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시구나. 그러니까 엄마는 홀로 온라인 바둑 게임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화면 속 엄마의 아바타는 속옷만 입은 채로 우두커니 서 있을 것이다. 언젠가 엄마가 바둑을 하고 계실 때, 얘가 옷을 안 입고 있네요, 옷 하나 사면 안 돼요? 하고 여쭤보았다. 엄마는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아바타 옷 그거 입힌다고 돈을 왜 써."라고 하시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그리고... (딸깍)




아바타의 비밀


엄마의 바둑 아바타 실력 참으로 변화무쌍했다. 저녁에는 아마추어 5~6급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아침이 되면 아마 2~3급 수준으로 일취월장했다.


(참고로 바둑 급수는 숫자가 낮아질수록 실력이 좋고, 급을 넘어 '단'으로 올라서면 숫자가 높아질수록 잘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창호, 이세돌 등은 가장 높은 단계인 바둑 9단의 실력자들이다. 때문에 9단은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고수의 경지를 말하기도 한다. 흔히들 '주부 9단, 눈치 9단이다'라는 말은 여기 바둑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엄마가 바둑 게임을 켜고 시작하실 땐 아바타의 모습이 2급이지만, 점차 바둑을 두시면서 실력이 조금씩 내려간다. 아바타의 실력은 결국 5급, 6급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또 며칠 뒤 다시 바둑 게임을 켜면 신기하게도 아바타는 다시 원래대로 2급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아바타가 머신러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머신 일이...?


그 비밀은 바로 저녁에는 엄마가, 낮에는 아빠가 바둑을 두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종종 불평하셨다. 엄마는 사실 2급 실력이 아닌데 아바타가 2급이다 보니, 자꾸 잘하는 급수의 사람들이 초대를 해서 바둑을 두면 매번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빠는 재미나시겠지. 아빠가 엄마 아이디로 로그인하게 되면 아바타가 6급이니, 아빠보다 실력이 낮은 사람들과 바둑을 두게 되어 자꾸만 급수는 올라가고... 또다시 며칠 뒤 저녁에 엄마가 로그인하면 2급이 되어 있고.




바둑 두는 풍경


사실 엄마의 바둑 취미는 꽤 오래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를 마치고 오면 엄마는 항상 집에 안 계셨다. 엄마를 찾으러 어디를 갔냐 하면 기원에 가 보면 계셨다. 마침 우리 동네에는 프로 바둑 기사분이 운영하시는 기원이 있었고, 엄마는 그곳 여성부 바둑교실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바둑을 두셨던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바둑학원에 보내셨고 한동안 바둑을 배웠다. 덕분에 나는 '대마가 잡혔다'든가 '집이 한 집 밖에 없어서 죽는다'든가 하는 말을 바둑판을 보며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바둑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바둑에 취미는 별로 없어서 바둑 학원을 오래 다니지 못했고, 그 대신 엄마의 바둑 공부는 쭉 계속되었다.


가끔 엄마와 아빠는 집에서 맞바둑을 두셨다. 두 분이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진지하게 바둑을 두시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 깊었다.  항상 아빠가 켜놓으시던 TV도 그때만큼은 꺼진 채 오로지 또각, 또각, 바둑알이 바둑판에 놓이는 소리만 들렸다. 묘한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는 초저녁이 마치 깊은 밤처럼 느껴지고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을 높였다.


아빠는 할아버지, 큰아버지들이 모두 다 그러셨듯이 바둑을 잘 두셨다. 아빠는 경남 바둑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시기도 했다. 가끔 아빠께서 죽은 돌을 쓸어 담을 때, 엄마는 식은땀이 흐르는 듯 보였다. 이때는 꼭 엄마와 아빠가 부부가 아니라 사제지간 또는 선후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밥상을 보고 마주 앉은 두 분과, 바둑판을 두고 마주 앉은 두 분은 전혀 다른 모습이셨다. 항상 엄마는 아빠께 몇 점을 깔고 두시긴 했지만 날로 바둑 실력이 늘어나셨다.  


바둑 대회를 앞두시고 엄마는 맹훈련에 돌입하셨다. 바둑책을 열독 하셨고, 기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아빠랑 계속 바둑을 두셨다. 몇 번 아마추어 바둑대회에 나가시더니 급기야 우승 트로피를 따 내셨다. 부상으로 떡두꺼비 같은 바둑판과 때깔 고운 바둑알 세트를 들고 오셨을 때, 엄마는 환하게 웃음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세상을 다 가지신 모습이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두고 요란스럽게 칭찬을 하진 않으셨지만 한편으로는 동네방네 엄마가 바둑 대회 우승을 했다고 자랑하고 다니신 것 같았다.




부부는 일심동체


집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엄마는 더 이상 기원에 나가시지 못하게 되셨다. 하지만 어디서 누군가 바둑을 인터넷으로 둔다는 얘기를 들으셨나 보다. 컴퓨터를 다루실 줄 모르던 엄마였는데,  갑자기 엄마는 한게임 사이트에 회원 가입하는 걸 여쭤보시더니, 어느새 인터넷으로 바둑을 즐기고 계셨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딱히 뭐라 그러시진 않으셨지만 너무 엄마가 눈이 건조해질 정도로 바둑 게임에 몰두하는 건 가끔 못마땅해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집에 늦게 들어오실 때면 온라인 바둑을 두셨다. 오직 틈날 때 하는 취미라 예전만큼 열정적이진 못하지만 가상 인터넷 세계에서 엄마의 아바타는 지난 몇 년 동안 실력을 갈고닦고 있었다.


물론 그의 활약은 밤이 아니라 낮에도 이어졌다. 낮이면 엄마의 아바타는 아빠의 아바타가 되어 점심시간에 훌륭한 전사로 분해 바둑을 두었다. 따로 또 같이 취미생활을 하시는 건가...? 이것 또한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리라.


요즘에도 여전히 엄마와 아빠의 손에서 활약하는 아바타. 다만 엄마, 아바타 옷 좀 입으면 좋겠는데요.




가끔 두 분이서 맞바둑을 두시는 풍경이 그립다.

그때 그 바둑판을 보며,
엄마와 아빠가 멋진 파트너라는 걸
자랑스럽게 기억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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