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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02. 2021

그 시절, 아빠가 좋아했던 엄마


아빠랑 둘이 데이트를 하게 되면, 어쩌다 마주친 아주머니들이 칭찬을 한 마디씩 덧붙이신다.


"아유 딸이 참 예쁘다~"


그럴 때면 아빠 꼭 하시는 말씀이 있다.


"제 처가 더 예뻤어요. 딸이 못 따라갑니다."


엄마의 옛 사진을 보면 고개를 끄덕끄덕이게 되는 사실이었다.




첫 만남


아빠는 전기밥솥을 들고 2층 계단에서 내려오시다 엄마를 처음 만나셨다고 한다. 전기밥솥과 삐걱대는 나무 계단,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는 한 수더분한 청년. 엄마에게는 웬 낯선 사람이 우리 집 위층에서 내려오다 말고 눈이 마주쳐버린 황당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 빼곤 아빠에 대해서는 전혀 인상 깊지 않았다고. 이렇듯 둘의 첫 만남은 별 볼일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조금 설레는 맘으로 엄마와 마주치길 기대하셨던 것 같다. 그 뒤에는 외삼촌의 큰 그림이 있었다.


아빠와 외삼촌은 대학 동창이셨다. 지금은 왕래가 뜸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빠와 외삼촌은 꽤나 절친이셨다고 한다. 외삼촌은 학과에서 좀 똘똘하다 싶은 아빠를 애초에 점찍어두셨다. 5남매의 장남이셨던 외삼촌은 아래로 여동생들만 네 명이나 있었고, 그중에 한 명 아무나 신랑감으로 아빠를 데려올 심산이셨던 것이다. 아빠를 원픽하신 외삼촌은 외할머니한테까지도 호언장담하셨다.


"어무이, 똘똘한 놈 있어서 조만간 데리고 내려 갈게예. 딱 사위 삼으면 좋은 친굽니더."


외삼촌은 (이모들의 의사는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말만 하면 니는 누구하고든 사귈 수 있다"는 식으로 아빠를 감언이설로 구워 삶기 시작하셨다.


"함 골라봐라. 첫째는 피아노를 치는데 성격이 좀 세고. 둘째는 제일 예쁘고 착하고. 셋째는 야무지고 귀엽고. 넷째는... 아직 학교댕겨서 좀 마이 어리지만. 그러니깐 니한텐, 아마 둘째가 딱 좋을 끼다."


그렇게 해서 아빠는 얼떨결에 외삼촌 집에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아빠 또한 시장조사를 쓱 하셨는데, 네 명의 여동생들 중에서 제일 예쁘고 순해 보였던 둘째, 바로 엄마를 마음에 담아두셨다. 하지만 전기밥솥 첫 만남 이후에 엄마 아빠는 따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때 당시에 엄마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빠한테 관심이 1도 없었고 친구들이랑 밖으로 놀러 다니기 바쁘셨다. 아빠도 그저 좀 예쁜 여동생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 두고 서울로 다시 올라가셨다. 졸업을 앞두고 시험을 준비하랴 그동안 빵꾸난 학점을 메꾸는 데 전념하기 위해 한동안 다시 놀러 내려올 겨를이 없으셨다고 한다.



새로운 만남


인연이 아닐 것만 같던 두 분은 그로부터 몇 년 뒤, 아빠가 군대에 계실 때 우연히 재회하셨다. 아빠가 휴가 나오셨을 때 어느 선배 한의원을 잠깐 봐준다고 들르셨는데, 그때 엄마는 (왜 거길 가게 되셨는지는 다시 여쭤봐야겠지만) 거기서 아빠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아빠가 약장 앞에서 흰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반하셨다고 한다. 그냥 '오빠 사람 친구'가 비로소 '남자'로 다시 보이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꽤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엄마는 그날 이후 아빠에게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하셨다. 그동안에도 외삼촌과 외할머니가 가끔 아빠 얘기를 꺼내시긴 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졸업을 앞두고 사회생활을 준비하면서 남자의 매력을 보는 또 다른 눈을 키우셨다. 아빠의 가운은 그 매력을 한층 배가시키는 것이었다고 솔직히 인정하신다.  


엄마가 마음의 문을 열게 되자, 아빠는 물밀듯이 적극적으로!


편지를 보내셨다.

긴 편지를,

긴 편지를 보내고,

또 보내고 긴 편지를.


엄마는 매번 아빠의 편지가 고마웠지만 조금 부담스러우셨다고 한다. 왜냐면 엄마가 답장을 하기엔, 아빠의 편지가 너무나 길어서... 대신에 엄마는 아빠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어느덧 아빠는 휴가 때마다 이젠 고향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엄마의 새로운 직장으로 멀리멀리 한달음에 찾아오셨다.



앳된 스물네 살

엄마는 무사히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거제도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첫 부임하시고 복도를 걸어 다니며 조잘조잘 아이들이 인사해올 때가 제일 황홀한 첫 직장의 기억이라고 하셨다. 그때 그 학생들의 졸업앨범에는 엄마의 모습도 선하게 남아있다. 으레 연출사진이 그렇듯 교무실에서 '집무' 모습, 머리카락으로 다 가리긴 했지만 책을 보는 척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계신 모습이셨다. 다른 사진에선 볼살이 통통한데 새침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누가 봐도 새내기 선생님이다.



그때 그 사진을 발견한 건 내 나이 스물셋인가 다섯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엄마를 보며, 문득 엄마가 많이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약간 배신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엄마는 심지어 흑백사진에서도 선명하게 알 수 있는 어여쁜 미모를 가졌다. (그때 중단발 머리에 조금 진해 보이는 눈썹은 약간 지금의 브레이브걸스 유나를 떠올릴 때의 인상과 닮았다.) 엄마는 볼에만 살이 있지 날씬해 보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때 엄마 생애 가장 날씬했던 시절이라고 하신다. 아직도 그때 입으시정장 옷들을 보관하고 계신데, 나는 감히 들어가지도 않고  후크가 잠기지도 않는 44 사이즈였다.  


엄마는 그렇게 생애 제일 날씬하고 예쁠 때 아빠와 만났다. 아빠는 멀리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휴가 때마다 오시고, 엄마는 그렇게 예쁜데 아빠에게 잘 보이려고 매번 꽉 끼는 치마를 입고 거제도 바닷가를 거닐다 배탈이 나셨다.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그렇게 산이며 바다며 산책만 하셨다고 한다.


오가는 긴 편지와 아쉬운 짧은 만남들, 긴 산책길 노을과 찰싹이는 파도가 함께 한 끝에. 어느새 두 분은 사랑이란 말도 필요 없이 미래를 약속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엄마가 나보다 더 예쁘다는 게 왜 낯설까.
왜냐면 내 기억 속 엄마는 항상 엄마였으니까.

하지만 아빠에게 엄마는 항상 이십대 꽃다운 그 시절 모습이다.
예쁜 딸보다 예쁜 엄마였다고 꼬옥 덧붙이시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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