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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05. 2021

국제한의원


어쩌면 아빠에게 가장 익숙한 호칭은 '아빠'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아빠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셨다.


아빠의 직장은 한의원.


수많은 사람들이 아빠를 '원장님'이라고 부른다.


아빠는 인생의 3분의 2를 원장님으로 살아오셨고,


나는 이제 아빠 인생에서 많은 족적을 남긴 그 흔적을 거슬러 가보기로 한다.





동민한의원


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몇 년을 복역하신 뒤, 아빠는 고향에 내려오셨다. 그 당시에는 대학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오는 게 당연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큰아버지 두 분 다 서울에서 터를 잡으신 걸 보면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아빠는 두 형이 서울에 살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와서 본인이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다만 아빠는 개업을 하기엔 아무런 밑천이 없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시내의 한 구석 건물 2층에 개업하셨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동민한의원'이라 이름 지으셨다.


엄마는 그때를 기억하신다. 신혼 초 아빠와 갓 결혼하시고 나를 임신하셨을 때였다. 아침밥상을 다 차리고 나면 먼저 출근한 아빠를 따라 한의원에 출근하셨다고 한다. 한의원 일을 도우러 가신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하신다. 그때 한의원에는 워낙 환자가 없었다. 엄마는 아무도 없는 침구실에서 잠깐 꿀맛 같은 낮잠을 자곤 하셨다. 아빠도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엄마랑 간호사에게 약장에 있는 한약과 약재들을 공부시키셨다.  


그만큼 한의원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개업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신참 한의사에게 약을 지으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두 번째 한의원


워낙 한의원이 안 되자, 아빠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철길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 자리였다. 아는 분을 통해 자리를 구해 그곳에서 새로이 시작해 보려고 했으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빠는 한의원이 홍보를 하거나 환자를 모아 온다는 걸 전혀 상상하지 못하셨던 듯했다. 이 새내기 한의사는 그저, 자신의 실력만 믿고 한의원 문만 열면 환자가 알아서 올 줄 알았다. 다른 동료 한의사들과 함께 개업을 시작했지만 심각할 정도로 한의원이 안 되는 건 아빠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한의원에 아무도 오지 않는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실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많은 자영업이 그러하듯 한의원 또한 '자리'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제대로 된 밑천 없이 구한 곳이다 보니, 두 번째로 연 자리 역시 첫 번째 개업했던 곳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아빠의 한의원이 있던 자리는 지금도 한 번씩 지나가면서 볼 수 있었는데, 내가 봐도 어쩜 어두컴컴하고 존재감 없는 곳처럼 보였다. 놀라운 것은, 한의원이 나간 뒤로 몇십 년이 다 되도록 그 뒤로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텅 비어있는 그곳을 보면, 당시에 얼마나 한의원에 아무도 오지 않았을지 상상이 간다.



국제한의원



그러던 중 지역에서 어느 연로하신 선배 한의원 원장님이 작고하셨다. 그분의 사모님께서는 한의원이 있던 자리를 팔려고 하셨다. 하지만 아빠는 한의원이 그대로 없어지는 게 아쉬우셨다고 한다. 고민 끝에 용기 내어 사모님을 찾아가 한의원을 그대로 이어받겠다고 하였다. 그 한의원이 바로 '국제한의원'이다.


여기서 기억의 오류 하나. 내가 기억하로는 이 국제한의원에 얽힌 이야기는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선배 원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후계가 없으셔서 아끼던 후배인 아빠께 한의원을 물려주셨다'는 게 내가 기억하던 스토리였던 것. 하지만 알고 보니, 작고하신 국제한의원 원장님과 아빠는 오가며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다시 진실을 고쳐 알게 되어 비록 애틋하게 미화된 추억은 사라졌지만, 또 한편으론 얼마나 현실적으로 아빠가 노력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는 과감히 동민한의원이란 이름을 버리기로 하셨다. 예전 국제한의원 원장님은 굉장히 주변에서 터를 잘 닦아 놓으셨고, 아빠는 이왕 자리를 물려받은 김에, 좋은 기운을 이어받고 싶어 '국제'라는 이름을 쓰기로 하셨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제한의원으로 옮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곳은 큰 길가와 기차역이 인접해 있었고 간판이 잘 보이는 좋은 위치였다. 한의원 자리를 옮긴 후, 아빠는 끊임없이 환자가 찾아오는 기이한(?) 현상을 처음으로 겪으셨다. 대부분은 예전에 계시던 원장님이 그대로 하시는 줄 알고 오신 환자들이었다. 함께하는 간호사 한 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빠는 참으로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좀 허무하셨다. 한의사라는 본인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단지 한의원 자리를 옮겼다고 해서 이렇게 천지차이가 나다니. 병원조차, 의사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람들의 입소문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깨달으셨다.


하지만 아빠는 지지부진한 고생 끝에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기로 했다. 처음에는 모르고 찾아오신 환자분들에게도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셨다. 옛 원장님이 아니어서 실망하셨던 분들이 나가실 땐 밝은 얼굴로 돌아가셨다. 점차 옛날 국제한의원 원장님이 아닌, 현재의 의사선생님(아빠)을 보러 찾아오는 환자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한의사로서 아빠의 경력 또한 시작되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빠는 아빠가 되기도 전에 이미 한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존재하셨다.

조금씩 과거의 아빠를 찾아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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