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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14. 2021

젊은 날에 닥친 환자의 사망 소식


어느 날 아빠는 한의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니 각오 단단히 해라."


불과 일주일 전쯤 약을 지어갔던 환자가 사망했고,


그날 형사들이 한의원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가 1991년이었다.


 


새 출발


아빠께서 첫 한의원을 개원하였을 때, 하루 종일 인기척이 없을 때가 종종 있을 정도로 한의원이 안 됐다고 한다. 새파랗게 젊은 한의사 선생인 것도 그렇고, 좁은 골목길 구석에 위치해 간판도 보이지도 않는 한의원에 환자가 찾아서 올리 만무했다.


그즈음 아빠는 엄마와 결혼을 하셨고, 가정을 꾸렸다는 생각에 더욱더 책임감이 생겨났다. 경제적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심 끝에 아빠는 한의원을 옮기기로 하셨다. 위치는 이전보다 훨씬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 곳인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으로도 유명한 어느 주유소 옆에 있는 건물의 2층 자리였다.


엄마는 아이를 임신한 채로 매일 새로 옮긴 한의원으로 출근하다시피 하셨다. 결혼하자마자 시댁에 들어와 시집살이를 하느라 아침에 잠깐 아빠를 보러 한의원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셨다. 때문에 새로 옮긴 한의원은 두 분에게 다 새로운 보금자리였고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러고 나서도 아빠와 엄마에게는 여러 경사가 겹쳤고,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아이까지 낳았다.


옮긴 한의원도 차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인맥도 쌓여가고 동네에서도 젊은 한의사가 하는 한의원이 약도 잘 쓰고 침도 잘 놓는다는 말이 돌았다. 여러 환자분들이 내원하기 시작하면서 매년 한의원 매출도 차근차근 늘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 드셨다고 한다.




방문


그러던 어느 날, 심상치 않은 기침을 하는 환자가 찾아왔다. 아내인 보호자가 동행했다. 조심스레 손목의 맥을 짚고 증상을 물었다. 기침이 한 달 넘게 계속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마른기침을 할 때마다 종잇장처럼 흔들리는 몸뚱이를 겨우 안정시키며 청진기를 가슴팍과 등 뒤에 갖다 대었다. 거듭 묻고 진찰한 결과 환자의 증상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천식이었다.


아빠는 기관지에 좋은 약재들로 천식약을 처방해 주셨다고 한다. 얼마나 처방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천식은 최소 한약 한 제(劑)는 먹어야 하는 병이었다. 한 제는 스무 첩이고 요즘의 포로 따지면 30포 정도의 양이다. 아침저녁으로 복용하면 최소 보름은 약을 먹어고 치료해야 호전될 수 있었다. 환자의 상태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보였지만, 우선 약을 먹어 보고 추후 내원하여 증상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보름도 지나지 않은 때에, 환자가 아니라 그 대신, 웬 형사들이 찾아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망


형사들은 아빠에게 얼마 전에 다녀간 그 환자가 사망했으며, 사망 원인을 찾기 위해 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말했다. 사망한 환자의 아내의 진술에 따르면, 이 한의원에서 약을 먹고 나서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것이다. 무슨 병이었고 어떤 한약을 처방했으며, 그 한약에 들어간 성분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환자에 진료기록을 가져와 달라며 가만있지 않고 간호사의 뒤에서 지키고 서 있자,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한의원에 온 다른 환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빠는 나서서 오늘 진료를 이만 마친다고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한의원은 수사관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모든 게 어수선해졌다.


아빠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형사들의 말과 그들의 질문공세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침착하게, 대수롭지 않게 흘러갔던 그날의 기억을 다시 복기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환자는 상태가 많이 좋지 않긴 했어도 곧 죽을 것처럼 아파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가슴이 떨렸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그 환자의 그날 낯빛, 상태, 주고받은 대화를 조곤조곤 말했다. 천식 환자로서 그 외에 특별한 점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 환자가 한약을 먹고 죽은 것이라면 어떡하지?'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 평범했던 그날로부터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까지 이른 걸 보면 앞으로 또 어떻게 상황이 이르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부검


그렇게 첫째 날 한바탕 한의원을 헤집고 나서야 형사들은 물러갔지만 그 뒤로도 형사들은 계속 찾아왔다. 고인의 가족들도 한의원에 와서는 울고불고 사람 살려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간 순으로 따지면 약을 먹고 난 뒤에 환자가 사망한 것이라는 게 얼핏 그럴듯해 보였다. 고인의 지병이었던 천식이 그리 특별할 것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한약을 의심할 만한 거리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병세가 그리 짙지 않았다고 소신있게 진술했다. 뿐만 아니라 조사결과 어떠한 약재도 이상이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운 나쁘게 급성 알레르기 반응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듭되는 고인 가족들의 주장으로 결국 시체 부검을 하기로 결정했다. 부검 결과가 나오기까지 며칠이 걸렸을까. 아빠에게는 그때가 정말 별의별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던, 생과 사를 오가던 시간이었다. 그때 아빠는 겨우 서른을 조금 넘긴 앞날이 창창한 젊은 한의사였고,  짧은 그간 평생 동안에도 순탄하게 작은 죄 한번 짓지 않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이젠 과실치사죄라는 엄청난 죄목이 나올 수도 있는 큰 일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앞날이 캄캄했던 것이다.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렇다면 아내는, 이 핏덩이 같은 두 딸은...!' 아빠는 그간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은 깡그리 쪼그라들어버리고 이젠 한치 앞날을 모르는 두려움으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차마 순진하게 육아에 여념이 없던 엄마에게 겉으로 다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빠는 엄마에게 당부했다.


"니 각오 단단히 해라. 사실은 이런 일들이 있었다.......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진짜 큰일 날지도 모르겠다. 일단 한번 기다려 보자."


그리고 마침내 부검 결과가 나왔다.



사망 원인


부검 결과, 사인은 영양실조. 한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인이 제대로 밥도 못 먹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천식이라는 병이 계속되는 기침에 호흡 곤란하게 만드는 병은 맞지만 그게 어디 사람을 굶겨 죽일 병인가.


아빠는 그때 환자 가족들의 그간 수사 진행상황에서 무례한 태도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살인을 의심해볼 수 있을 법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환자의 가족들이 고인에게 살인의 고의를 갖고 밥을 제대로 먹이지 않았거나, 환자를 거의 방치했음에도 한약 때문이라며 그 잘못을 한의사에게 덮어 씌웠거나, 또는 최악의 상황으로는 일부러 한약을 빌미로 삼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의원을 방문했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수사관들은 180도로 바뀐 이 상황 속에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젠 고인의 가족들을 의심해볼 차례였고 아빠가 무고죄로 고소를 하면 얼마든지 수사가 진행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아빠는 더 이상 수사를 원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는 게 밝혀졌지만, 이미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허무한 진실은 그간 마음고생을 하느라 지치고 지친 상처뿐인 가슴만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난리를 피우던 고인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형사들을 비롯해 아빠 스스로도 한약이 환자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너무나도 괴롭혀 왔던 것이다. 아무런 죄가 없던 아빠는 한순간에 거의 살인자가 되었다가 이젠 또 한순간에 무고한 자가 되어 버렸고, 그것은 실소가 나오게 만드는 현실이었다.



떠남의 계기


아빠는 가까스로 혐의는 벗었지만, 그 후유증은 한동안 지속됐다. 이미 수사가 진행되는 수 주일 동안 형사들은 수시로 한의원을 들락날락거렸고 그 때문에 환자의 발걸음은 끊긴 지 오래였다. 애초에 퍼진 흉흉한 소문은 훗날 무고한 일이었다는 것이 밝혀져도 좋은 소문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큰 일을 겪고, 그보다 더한 무료하고 지난한 날들을 보내게 되자, 아빠는 더 이상 그곳에서 한의원을 지속할 수가 없으셨다고 한다. 결국 이사를 하고 나서 몇 년 간 새싹처럼 희망을 키우던 두 번째 한의원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국제한의원' 글에서는 한의원의 위치가 너무 안 좋은 바람에 또 이사를 갔다고 쓴 적이 있지만, 사실 알고 보니 이러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결국 이 일은 아빠의 인생에 닥친 첫 번째 시련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아빠는 한의원을 옮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일찍이 쏟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훗날 더 좋은 인연과 더 좋은 한의원 터를 만나게 된다.  마음고생과 시련의 기억은 그렇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열정을 다했던 젊은 시절 갑작스럽게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셨던 아빠.

그 또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 과거의 세세한 묘사는 아빠의 말씀이 아닌 딸의 일부 상상이 가미되었음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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