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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15. 2021

아빠가 한의사라는 사실이 나에겐


우리 아빠한의사이시다.


그리고 한의원을 운영하셨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내겐 어릴 적부터 마음의 짐 같은 것이었다.


한편으론 좋고 한편으론 나빴다.





자랑처럼 보일까 봐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매우 부담스러웠다, 아빠가 한의사라는 사실은. 나는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빠의 직업을 말하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어릴 적에는 최대한 숨기려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아빠는 한의사"라며 떡하니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내 인생에서 무척 예외적인 순간이다.


어떤 이야기에서 아빠의 직업이 안 좋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었던 것과는 반대로, 배부른 고민이긴 하지만 나는 아빠의 직업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숨기고 싶었다. 그건 모두 다 과민한 내 성격 탓이다.



내가 중학교 때,


우리 집은 아빠의 한의원 근처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전학이란 걸 하게 되면서 낯선 환경에서 교우관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전학을 가자마자 전교 1등을 하고, 전학 온 애가 엄청나게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그 때문에 나는 친구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까 봐 무척 걱정했다.


심지어 이사를 간 집은 이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집이었다. 예전에 살던 곳은 아파트 단지 안에 학교가 있어서 친구들이 사는 집이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는데, 이사를 온 곳은 내가 사는 아파트만 작은 동네 주택가 단지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걸, 뒤늦게 다른 친구의 집에 놀러 가 보고 난 뒤라야 깨달았다. 나는 그때부터 친구들을 우리 집에 전혀 데려오지 않았다. 아빠가 한의사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에 나는 꽤나 이 문제로 예민했다. 친구들이 우리 집을 잘 사는 집이라고 생각할까 봐, 선생님이 나를 편애한다고 생각할까 봐, 나는 온 사방을 살피고 손을 비벼대는 햄스터처럼 친구들의 눈치를 너무 많이 봤다. 이리저리 날아다녔던 어린 시절과 달리 급격히 소극적으로 성격이 바뀐 시점이었다.


그래서 한의원을 확장 이전을 하게 되었을 때는 (나에게만큼은) 난처한 상황도 벌어졌다. 사람들을 초대하는 재개업식을 열면서 아빠께서는 친구들도 데려 오라고 초대장을 주신 것이다. 아빠는 모르셨겠지만, 나는 빨리 해치우고 싶은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마냥 초대장을 친구들한테 대충 나누어줬다. 친한 친구들도 별로 없었는데, 마침 초대에 응해 온 친구들의 반응은 내가 우려하던 그대로였다. 우리 집 한의원이 완전 크다, 걔네 아빠 부자다,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걸 보면서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친구들이 나를 미워할까봐서였다.



괜히 부담스러워서



고등학생 때는 좀 다른 이유가 생겼다.


괜한 반발심이라고나 해야 할까. 나는 일찍이 한의대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한 번도 내게 한의대를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누구도 시킨 적 없는데, 나는 부담을 느꼈다. 혹여나 한의대에 가라고 '생각'할까 봐 그게 걱정이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다른 한의원의 자녀가 대를 이어 한의사가 되기 위해 거듭 재수 삼수를 하는 걸 보면서, 그게 부모님이 시킨 것인지 스스로 원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심 저렇게 하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 자립하고 싶다는 생각은 엉뚱하고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돼 버렸다. 남들이 꿈꾸는 의사, 한의사와 같은 전문직 그저 진료실,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답답한 직업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으로 심리적인 우월감을 쌓거나, 또는 내가 그 직업군을 선택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애써 만들어 냈다. 내 꿈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어렴풋이 내 꿈이 적어도 의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아빠와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내가 문과를 가게 된 사실은 단지 의사가 되기 싫어서였다.


"의사는 안 할 거예요."


"그럼 이과 가지 마라."


이 한 마디 대화로, 그렇게 해서 오게 된 것이 문과였다. 사실 내가 의대, 한의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이었는지도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땐 정말 애초에 이과를 벗어나서 의대에 갈 수 있는 싹수를 자르는 것만이야말로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난 수학, 과학 성적이 더 좋았고 수능 때에도 여전히 국어와 영어 실력은 잼병이었는데 도대체 내가 왜 문과를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이때 이과를 가지 않은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 당시에는 한의대가 정말 인기 있기도 했고, 아빠 주변에 많은 한의사분들의 자녀들이 있기도 했고, 그래서 주변에 한의대를 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주위 사람들도 은근히 내게 한의대를 갈 것을 기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보단, 그 기대를 거스르는 데에 더 큰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예전에는 그게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치기 어린 반발심에 지나지 않았다. 반항은 용기가 없어할 줄 모르겠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내게 기대를 할라치면 나는 약간 방향을 틀어 버렸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것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성질머리 때문에, 나는 아빠가 한의사라는 사실마저도 그저 안 좋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이건 모두 나의 성격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 그렇게 남들이 "너희 아빠 한의사라며?"라고 말하는 게 싫었는지, 그땐 왜 그게 하나같이 모든 게 부담스러웠는지. 지나고 나면 참 별 것도 아닌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조금은 아빠의 직업에 대해 편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대학교에는 온갖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정말 잘 사는 집 아이들이었다. 우리 과에는 타워팰리스에 산다는 어느 친구가 있었고, 누구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도 있었고, 또 어떤 친구는 아빠가 외교관인 친구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서 예전에 조그만 소도시에서는 조금 잘 사는 축에 속했던 우리 집이 정말 별 거 아니고 평범한 수준이란 걸 깨닫게 됐다.


참 웃기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도 솔직히 말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아빠는 어쩌면 내가 한의대를 가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어디를 가라"라고 강요하진 않으셨다. (비록 의대 가기 싫으면 이과 가지 마라고 말씀하셨을지언정.) 아빠는 끝까지 나를 지켜보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내가 아빠의 예상과는 다른 결정을 내려도 일단은 지켜본 뒤 나중에 뒤늦게라도 지지해 주셨다. 그런 아빠였음에도... 이제 와서는 내 진로에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는지 탓했던 나는, 내가 뒤틀린 심사를 가지고 살았던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래서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 주변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의 편견과 반발심에 사로잡혀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아빠가 한의사라는 사실은 그래서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아빠는 그 존재만으로도 매우 거대해서 나를 구속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사실 그런 건 내가 느낀 것일 뿐,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편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아빠가 한의원을 한다는 걸 숨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친구들에게도 우리 집에 놀러오라고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약 한의대를 갔더라면 아빠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지금 아빠에게 더할나위없이 든든한 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이가 드신 아빠를 보면서, 그리고 나이를 먹은 나를 보면서, 자잘한 후회들이 밤이슬처럼 쌓다.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어린 마음.
그게 비록 부정적인 발로였다 하더라도
현재의 나를 만들게 된 것은
어떤 부분에서 아빠가 한의사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아빠는 내가 이렇게 생각했던 걸 과연 아실까?
뒤늦은 후회를 덧붙여 언젠가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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