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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08. 2021

국제한의원은 쉽니다

안녕하십니까?
국제한의원 신동민 원장입니다.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약 3달 정도 한의원을 쉬게 되었습니다.
9월 추석 즈음에 다시 개원해서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고 또 여름 동안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혹 매우 급하신 용무 있으시면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010 **** ****
건강하시길 빕니다.

신동민 드림.



초심으로


몇 년 전이었던가. 언제부턴가 아빠는 한의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하셨다. 아마 아빠가 환갑을 몇 년 앞두고 있으셨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다들 의아했다. 요즘 정년도 늘어나고 다들 일을 오랫동안 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시다니.


아빠는 그때 정정하셨다. 체력적으로 힘들어서가 아니라, 심적으로 힘드셨거나 어떤 다른 꿍꿍이가 있으셨을 것이다. 내가 꿍꿍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아빠의 속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사실 나는 아빠의 생각을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는 내 주변이 너무 바빴고, 나의 삶이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시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한의원을 옮겨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셨다.  자리는 아빠가 초창기 국제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한의원을 시작했던 곳이다. 십여 년 전 한의원을 크게 확장해서 도심 큰길가에서 간판이 바로 보이는 곳에서 두 번째 '큰 국제한의원'을 시작했었더랬다. 그런데 다시 원래 있던 1층 '작은 국제한의원' 자리로 되돌아간 것이다. 아빠께서 한의원 규모를 축소하며 옮기자, 나는 그저 아빠가 한의원을 그만둘 계획을 조금씩 실천하고 계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옛날 국제한의원 자리로 돌아가자, 아빠는 이상하게 다시 활기를 되찾으셨다. 진료실도, 침구실도 작아지고 간호사도 이젠 1명이지만, 아빠는 고향에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라며 무척 좋아하셨다. 다시 조금만 더 한의원을 해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아빠는 한의원을 정말 그만두고 싶으셨던 게 아니라, 익숙한 하루를 반복하며 지내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한의원에 진심


누군가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의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게 그냥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라는 의미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게 바로 전문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메리트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아빠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빠는 한의원에 정말 진심이셨으니까. 아빠는 '작은 국제한의원'으로 옮기기 시작하면서 빨간 날은 모두 쉬기로 하셨다. 그 말은, 이전까지는 주중에 공휴일이 있어도 쉬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료를 보셨다. 뿐만 아니라, 토요일에도 오후 5시까지 한의원을 해 오셨다. 일 년에 다 합쳐봤자 5일 정도의 휴가를 보내시곤 했다. 그러한 세월이 어언 30년이었다.


아빠는 일요일에도 종종 직접 한약 배달을 가시곤 했다. 하루가 채 안 걸리는 택배조차 그 귀한 약이 상할까봐 걱정되셔서였다. 주중 공휴일에도 한의원을 하셨던 이유 환자들에게 일관되게 진료를 하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란다. 아빠는 휴가를 가시더라도 한의원 전화를 휴대폰에 연결해놓고 환자들의 전화를 자주 꼬박꼬박 받으셨다.  아빠는 또 한동안 휴가를 농촌 의료봉사활동으로 대신하시기도 하셨다. 한의사협회에서 봉사활동을 주최할 때마다 빠짐없이 나가셨던 아빠. 그래서인지 어디를 가시더라도 항상 꼭 상비약과 침을 챙겨 다니시는 게 아빠의 버릇이 되었다.


과연 내가 아빠를 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빠에게 이젠 좀 적당히 일하시라고, 이젠 워라밸 시대라고 아빠를 타박했던 나는 그럴 자격이 있을까. 정작 나는 단 한 번도 아빠처럼 열심히 일해본 적이 없으며, 일의 고됨이 어떤지 모른다. 단지 매일 꾸준히 몇십 년동안 일해본 적이 없어서 상상을 할 수 없을 뿐이다. 아빠에게 한의사라는 직업은 생계이기도 했고 환자분들과의 약속이기도 했고, 또 본인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아빠의 한의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씀, 그리고 한의원을 옮기고 다시 시작하시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 큰 딸이란 나는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야 후회가 되는 것이다.




아쉽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의원을 작은 곳으로 옮기고 나서 아빠는 이전과는 달리 조금 여유롭게 진료시간을 조정하셨다. 평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토 일은 쉬시기로 하셨다. (우리에겐 너무 당연하지만) 평일 공휴일에도 이젠 쉬기로 하셨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다시 주6일 근무를 하시기로 하면서 토요일, 목요일 오전 근무만 하시기로 살짝 변경하셨다.  


주 5일제가 당연한 나같은 사람들이 보면 도대체 어디가 여유로워지셨다는 건지, 딱히 대단한 변화가 아닌 것 같지만, 그동안 한의원에 매여 있다시피 하신 아빠를 생각하면 이건 꽤 많은 휴식시간을 확보하신 것이다. 아빠도 이제는 남들 쉴 때 조금은 쉬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신 것 같았다. 그렇게 너무 팽팽하던 아빠의 일상이 조금은 숨통이 트인 것 같을 때,


아빠는 한의원을 쉬게 되셨다.


안녕하십니까?
국제한의원 신동민 원장입니다.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약 3달 정도 한의원을 쉬게 되었습니다.
...


아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음에도 아빠는 침착하게 환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부터 걱정하셨다. 그 많은 환자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돌리고 아빠는 또 수많은 메시지와 전화를 받으셨다.


얼마 전 집에 가 보니, 아빠는 무척 피곤한 모습이셨다. 한의원을 쉰다고 하니 쉴 새없는 연락들, 걱정하는 환자들과 지인들 덕분이었다. 오히려 밀려든 한약 주문과 진료들 때문에 지난주 마지막 토요일에는 늦게까지 약을 다리시느라 녹초가 되어 오셨다. 하지만 많은 환자분들은 아빠의 소식에 아쉬워하셔서 오히려 많이 미안한 모습이셨다. 마지막으로 한약 배달을 갔을 때 갑작스레 홍합을 안겨주시는 분도 있는가 하면, 직접 낳은 알이라며 청계 두 판을 들고 오시는 환자분도 계셨다. 여러 환자분들이 오히려 아빠를 걱정하며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그런 모습을 보며, 다시금 아빠가 얼마나 환자분들에게 진심이었는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잠깐 쉬는 것임에도 많이들 서운해하시는 걸 보면서, 아빠가 정말로 한의원을 그만두게 되신다면 참 많은 사람들이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장 슬픈 사람은 아빠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변화가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왜였을까.
한의원을 한다는 건 아빠에게는 평생 동안의 업이었고, 인생이었다.
아빠의 인생에 변화가 필요할 때 정말 필요한 것은 초심이었다.




이젠 좀 여유롭게 일하기로 마음 먹으셨을 때,
아빠는 예기치 않은 쉼표를 찍게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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