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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18. 2021

엄마가 아빠 옷을 사는 법


아빠는 쇼핑을 싫어하셨다.


내가 아빠를 닮았지.


일단 백화점에 가서 10분을 넘기면 갑갑한 느낌이고


옷을 여러 번 입어보는 게 귀찮고


그렇게 입고 나면 꼭 사야만 할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서)


백화점에 가면 아빠는 꼭 화장실 앞 소파에 앉아계셨다.


엄마는 학을 떼셨다.


"아빠 옷 사는데 아빠는 관심이 없어~ 어쩌란 말이고!"



직접 가봤자


어렸을 적 기억은 대부분 그러하다. 백화점에서 엄마와 아빠가 실랑이를 하는 모습. 엄마가 사정하다시피 아빠를 백화점에 데리고 나오는 데에 일주일이 걸리는 반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함께 하는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이 색깔이 맘에 들어요? 엄마가 물어보면 "어, 괜찮네."

이거는요? 또다시 물어보면 "괜찮네."

이게 좀 더 나은 거 같은데? 다시 고민할라치면 "그냥 아무거나 사라."


결국 엄마는 아빠 옷을 엄마가 고르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고 해서 아무거나 사 오면 아빠는 그 옷을 한 번도 입지 않으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중에서야 "무늬가 안 예뻐." 또는 "이게 여기가 까끌까끌하더라."라시며 퇴짜를 놓으시는 거였다.


그러니까 좀 입어 보라니까 왜 안 입어보고. 엄마가 답답해하시는 걸 내가 옆에서 지켜만 봐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아빠는 까다로운 건지 아니면 정말로 옷에 관심이 없으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를 백화점에 데리고 가는 것도 너무 힘들고, 막상 백화점에 가봤자 아빠는 고르시지도 않고, 나중에는 사온 옷들을 입지도 않고. 엄마는 지쳤다. 어느 날은 그래서 바겐세일이라고 잔뜩 맘먹고 백화점에 가셔서 옷을 사 오셨는데 아빠 옷은 없었다. 그러면 또 아빠는 은근히 "왜 내 옷은 없네?"라고 하시며 서운해하시는 거였다.



작전 변경


그러한 패턴이 계속 반복되자, 엄마는 어느새부턴가 작전을 바꾸기 시작하셨다.


아빠가 백화점을 가는 걸 싫어하시니 ㅡ 옷을 집에서 입어볼 수 있도록 먼저 사 온다.

아빠는 고르는 걸 싫어하시니 ㅡ 엄마가 생각할 때 괜찮은 몇 가지 종류를 먼저 골라 온다.


오직 아빠만을 위한 큐레이션을 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단, 백화점 점원에게는 도통 백화점에 오길 싫어하는 남편 때문에 옷을 집에서 입어보려고 미리 여유 있게 사는 것이니 입어보기만 하고 나중에 반품을 해도 되겠냐고 미리 양해를 구하셨다. 어차피 가는 매장이 몇 군데 없고 엄마도 가는 곳만 가시는 단골이셔서, 매장 직원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아빠의 체형이나 사이즈는 사실 고만고만하게 변함이 없으므로, 엄마는 엄마가 보기에 괜찮은 디자인으로 색깔만 다른 두 가지 옵션을 사 오셨다. 혹시나 사이즈가 고민된다면 딱 두 가지 사이즈 옵션을 동시에 골라 오셨다. 예를 들면, 면바지 중에서 회색과 감색이랑, 감색 100과 105 사 오시는 거였다. 아빠는 딱 2가지 중에서 하나만 고르면 되는 것이었고, 사이즈를 고르기 위해 딱 2번만 입어보면 됐다.


엄마의 작전 변경 이후로, 신기하게도 아빠는 순순히 옷을 몇 번 입어 보고 결정하신다. 아마도 집에서 편안하게 옷을 입어 보고 또 너무 고민하지 않도록 선택지가 한정돼 있어서 아빠의 부담이 훨씬 덜해지신 것 같았다. 그렇게 아빠는 본인이 직접 옷을 선택한 뒤로 후회 없이 입기 시작하셨다.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이젠 옷을 사는 것에 스트레스를 덜 받으신다.



이유 없는 게 아니라


한편, 아빠가 옷을 사놓고도 이유 없이 안 입으시는 옷들에 대해서, 엄마는 어느 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셨다.


어느 순간 아빠가 매일 어느 격자무늬 셔츠만 입으시더라는데, 그게 알고 보니 주위에 어느 분이 그 옷이 예쁘다고 칭찬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엄마의 짐작은, 아마 어떤 사람이 아빠가 입은 옷을 보고 별로라는 말을 무심코 던졌는데, 그래서 그 뒤로 안 입으시는 것이란 거였다.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아빠가 못 보던 옷을 입고 계시길래, 엄마한테 물었다. 아빠 새 옷 사셨네요? 그러자 엄마는 속삭이며 내게 말했다. "아빠한테 가서 말해드려라, 옷 예쁘다고." 나는 엄마의 뜻을 완벽히 파악하고 약간 오버스럽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을 개시했다.


"아빠~ 확실히 아빠는 선명한 색 티가 잘 어울리시네요. 역시, 요즘 같은 날씨에는 흰색 파란색이 시원하게 보이고 좋다~!"


아빠는 무뚝뚝하게 "응" 한 마디 하실 뿐이지만, 그 무표정 속에 슬그머니 웃음 짓는 아빠의 얼굴이 있더란 건 나와 엄마만이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칭찬을 듣고 나면 아빠는 꼭 그 옷에 애착을 가지시곤 한다.


이 치명적인... 아빠의 호불호 기준은 다름 아닌 가족들의 칭찬이었음을. 아빠께 예쁘다고 칭찬한 옷을 거의 매일 입고 나가시는 걸 보면서, 아빠도 좋아하는 게 분명히 있으시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그런데 아빠가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니.



아빠는 맨날 똑같은 체크무늬 셔츠만 입으시고 똑같은 색깔 바지만 입으시고, 다 똑같이 생긴 디자인의 비슷비슷한 색깔의 옷들만 입으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이발하시고 온 날 아빠 머리는 그저 짧아만 졌을 뿐 언제나 똑같은 3:7 가르마였. 남자 옷과 패션이 대부분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아빠에게 무심했던 게 아닌가 한다.


비록 쇼핑에 영 취미가 없으신 아빠이시긴 해도, 아빠도 가끔은 멋있다, 옷이 예쁘다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신다는 걸 조금은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이제껏 아빠께 "아빠 멋있어요!" 그런 말도 많이 못 해드렸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엄마는 그런 아빠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신 듯하다. 그래서 요즘 아빠의 패스타일은 전형적이지만 아빠의 취향(사실은 엄마의 취향)이 정확히 묻어나는 옷들 위주로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 아빠를 보면서, 그 뒤에 엄마의 숨은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아빠의 패션 스타일이요?
아빠는 취향이 확고하십니다.

엄마가 골라오시고 우리의 칭찬이 더해지면
그게 바로 아빠의 취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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