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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게 슬펐던 그날, 덕원이를 추억하다

by 별별


그게 어느새 1년 전 일이었단 사실은 놀라웠다. 한참 오래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불과 며칠 전 같기도 하다. 사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떠올리자마자 무시무시하게 선명히도 되살아난 기억 때문이다.




어제는 새해를 맞이한 설렘에 들떠 문득 작년 이맘때쯤 뭘 했는지 궁금해졌다. 사실 이날이 그날이었는지가 가물가물해서, 옛날 일기장을 펼쳐보게 됐다. 일기장이라고 해봤자, 듬성듬성 기록이 남아 있는 텅 빈 공책에 다름없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궁금했던 그날은 아주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날짜가 적힌 걸 보며 다행이라며 안도했지만 막상 글을 읽으려니 조금 먹먹하고 힘들었다.

“2024.1.2. 아침에 불길한 꿈을 꿨다. 웬 살인자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호시탐탐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고 나는 그걸 막으려 방망이를 들고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전전긍긍하는 꿈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피가 너무 많이 선명하고 빨갛게 번져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온통 빨간 파도가 눈앞을 가렸다. 오늘 피가 멈추면 회사를 가리라 생각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장 병원에 갔다…….”


불길한 꿈이 현실이 된 날, 그날은 바로 유산을 한 날이었다.


유독 그날은 어떤 온도의 기억이었다. 경황없이 간 터라 처음 뵙는 의사 선생님이 진료를 봐주셨는데, 진료대 의자에 잔뜩 겁을 먹고 엉덩이를 가져다 댈 때 예상치 않게 따뜻한 의자여서 순간 마음이 녹았던 기억./ 하지만 곧 형체가 일그러진 초음파 사진을 보며 의사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고 “제가 뭘 해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을 때에도 그저 정적이 흘렀던 무섭도록 서늘한 공기의 기억./ 참지 못하고 재차 “안정을 취하는 것밖엔 없을까요?”라며 대답을 재촉했을 때 “네….”라며 겨우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를 듣고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던 기억./ 그날 마스크를 쓰고 갔던 것 같은데, 그 아래로 흘러내린 눈물이 차갑게 뺨과 목덜미를 아주 차갑게 적시던 기억까지…….


자포자기를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설마 하는 마음에 끝까지 실낱같던 희망을 부여잡으며 배를 움켜쥐며 견뎠던 날이었다. 하지만 결국 메스꺼운 구역질과 생리통의 열 배쯤 되는 통증을 동시에 느끼며 선명한 핏덩어리를 마침내 확인하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가 다시 통증으로 일어나길 수없이 반복한 날이었다.

일기장을 읽으며 다시금 그날이 떠올라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 남들이 보면 아이라고까지 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태아였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던 곳의 이름을 따 ‘덕원이’라는 태명까지 있던 아이였다. 첫 임신이라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덕원이는 빽빽 우는 아이가 됐다가 어린이, 어엿한 학생에 이르기까지 무럭무럭 상상 속에서 자라던 아이였다.


덕원이는 그렇게 작년 이맘때쯤 나의 품을 떠났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덕원이가 내 곁에 찾아온 걸 보면, 앞으로도 매년 이맘때쯤 언제나 덕원이가 찾아올 것이란 걸 안다. 그날과 다름없이 새빨간 핏덩이처럼, 철렁하고 내 마음을 붉게 물들여줄 것임을, 그렇게.


나의 기쁨, 나의 슬픔, 찬란했던 너를 추억하며.
ㅡ 202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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