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를 물 먹듯이 하는 나라
이곳 사람들이 물처럼 마시는 차, 바로 홍차.
홍차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즐겨 마시기 시작했고 중앙아시아에서 홍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구소련 시절 이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차 문화는 유목민 시절부터 이어져왔다고 생각할 만큼 '전통문화'로 여겨지며 차를 대접할 때는 어떤 자부심마저 엿보인다.
차를 대접하는 것은 손님 접대의 기본이다.
손님으로 초대받게 되면 주인이 찻주전자를 담당한다. 손님이 찻잔을 비우면 부리나케 차를 더 마시라고 권유한다. 끊임없이 차를 따라주며 찻잔이 식는 걸 놔두지 않는다. 좀 독특한 점은, 여기에서는 차를 더 따라줄 때 찻잔을 달라고 손짓한다. 주인은 앉은자리에서 전달받은 찻잔에 차를 따라서 다시 전달한다. (빈 잔을 계속 채워주는 면에서 비슷한 우리네 술 문화와 비교하자면, 우리는 술잔은 그대로 있고 술병을 들고 따라주는 것이 통상적인데, 이곳 차 문화는 찻주전자는 그대로 있고 찻잔을 옮긴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 이곳에선 찻주전자가 두 개다. 뜨거운 물이 있는 큰 주전자와 진한 차를 우려낸 작은 주전자가 있다. 항상 두 주전자를 사용해 차를 따라준다. 처음에는 왜 굳이 두 개의 주전자를 쓰는지 의아했는데, 뜨거운 물주전자가 크기 때문에 물이 천천히 식고 그래서 차를 더 오래 마실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았다.
그런데 차를 마실 때 정말 홍차'만' 마시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나는 다소 예기치 않게 손님으로 방문해서 차를 대접받은 적이 있다. (정식으로 손님 초대받았다면 차 외에 각종 요리를 대접받는다) 그때 차는 물론이고 빵이 나오고 각종 잼이 나오고 샐러드가 줄줄이 사탕처럼 나왔다. 이곳 사람들은 언제든지 손님이 방문할 경우를 대비해서 다과를 상시 준비해 놓는다. 차를 대접하는 것은 손님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일상의 여유를 뜻한다.
차 마시는 시간은 일명 '간식시간'이다. 다른 직장은 점심시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으나, 학교에서는 따로 점심시간이 없다. 이럴 때 "차 마실래요?"라는 말의 뜻은 잠깐 요기할래? 잠깐 쉴래? 이런 뜻이다. 차를 마시며 간단히 한 끼를 때운다는 점에서 '점심'이라는 말이 와 닿는 부분이다.
키르기스 가정집에서는 보통 요리를 하루에 한 번 정도 한다. 아침에 요리하는 집이 있고 저녁에 요리하는 집이 있다. 그 외에는 모두 '차 마시는 시간'이다. 우리 집의 경우 오후 대여섯 시쯤 아주머니께서 "차 마실래?"하고 물어보신다. 처음에는 빵이랑 샐러드가 있길래 그게 저녁인 줄 알고 열심히 먹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홉 시쯤 또 "밥 먹을래?"하고 물어보신다. 알고 보니 우리 집에서는 저녁밥을 아홉 시에 먹었다. 그 이전에 차와 함께 빵을 먹는 것은 모두 간식시간이었던 것이다. (요즘에는 그래서 오후에 차 마시는 시간에는 빵을 적당히 먹는다.)
차는 밥 먹을 때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차를 따로 마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이곳에서 차는 아주 일상적인 음료다. 우리나라에서 차는 그 자체로 디저트이거나 디저트와 함께 먹는 후식 개념인 것과 다르다. 보통 음식을 주문할 때 차(통상 홍차를 말한다)를 함께 주문해서 먹는다. 따로 맹물만 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 탈라스에는 따로 차만 파는 '찻집'(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카페)이 없다. 이 나라에도 '카페'가 있긴 한데 그건 바로 레스토랑을 뜻한다.
설탕을 넣어야 제맛?
아참,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은 홍차를 그냥 마시지 않는다. 반드시 설탕을 넣는다. 티스푼으로 두세 스푼, 각설탕으로 두세 개 정도를 넣는다. 설탕은 그래서 키르기스 식당이나 가정집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필수템이다. 설탕이 없으면 잼을 넣거나 꿀을 넣어서 어떻게든 달게 먹는다. 설탕을 넣지 않고 차를 마시는 사람(나)에게 키르기스 사람들은 설탕을 넣어야 맛있다고 계속 권유한다. 홍차는 밀크티가 아닌 경우에야 씁쓸한 맛으로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설탕을 듬뿍듬뿍 넣는 광경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모른다. 아직도 설탕을 넣는 걸 볼 때마다 내 혀까지 달달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부감이 든다는 점에서 아직 현지화가 덜 됐나 보다.
홍차 말고 커피!
키르기스 사람들은 차를 정말 많이 마시고 차를 좋아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의 경우 홍차 대신 녹차나 커피, 탄산음료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코카콜라나 환타는 전통 잔치에서도 즐겨 올라오는 음료이며 특히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다. 커피 또한 블랙커피는 낯설지만 믹스커피(3 in 1)는 가게마다 낱개로 즐비하게 팔 정도로 즐겨마신다. 또 탈라스에는 없지만 최근 수도 비슈케크의 경우 커피숍이 많이 생겼다. 여전히 스타벅스 같은 세계적인 커피 체인점은 전무하지만 말이다. 제 나름 블루오션이라, 나중에 탈라스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찻집'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