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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Oct 22. 2017

랑방 잔느

내 생애 첫 '로맨틱'의 기억


한 후배에게서 반가운 메시지를 받았다. "선배 잘 계세요? 한국은 이제 가을이 와서 선배가 주신 랑방 잔느를 뿌렸다가 선배 생각이 뭉게뭉게 나서 연락을 드려봤어요."


갑자기 왠 '랑방 잔느'? 내가 향수를 선물해줬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나는 갑자기 웬 기억이 내 머릿속을 흔들어놓도록 가만히 놔두고 말았다.



연애란 걸 하고 있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있는 티 없는 티를 다 냈다. 향수를 생일 선물로 갖고 싶다고. 유치하게 흘러가는 말처럼 한다는 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시치미 뚝 떼고 내 유치함을 받아줄 수 있는 꽤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선물을 받아 들었을 때, 나는 직감으로 그것이 향수란 걸 알았다. 하지만 포장을 뜯었을 때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바로 '랑방 잔느'였기 때문이다. 


사실 향수를 좋아한다곤 하지만 향수를 잘 알지도 못했던 나는, 유일하게 싫어하는 향수가 하나 있었다. 그래, 나는 '랑방 잔느'를 정말 싫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 말 못 하게 내 속을 썩이던 룸메가 항상 뿌리고 다니던 것이 바로 그 향수였다.


원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성격에, 나는 진심으로 고맙단 말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심으로 놀라을 표현했다. 그 향수는 자그마치 100ml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30ml 도 아니고 50ml 도 아니고 게다가 100ml 라니. 당장 코앞에 닥친 이 향기만도 감당하기 벅찬데, 이걸 하루에 1ml씩 뿌려대도 100일이나 써야 한다니. 남자 친구란 사람이, 생일 선물로, 그것도 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향수를 선물로 줬는데, 안 뿌릴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하필 '랑방 잔느'인 거지??


나는 그에겐 말도 못 하고 꾸역꾸역 그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그러면서 온 집 안에 향수를 방향제처럼 뿌려댔다. 얼른 써 버리고 싶었다.


그 향수는 나에게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한 집에 살면서 한 집에 사는 것 같지 않았던 룸메. 지금 떠올려보면 그 친구는 꽤 외로움을 탔던 것이었지만 다람쥐처럼 자기 방에 틀어박히던 룸메와 이상하게 친해지기 힘들었다. 오히려 사사건건 그의 습관이 무척 거슬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다지 쿨하지 못했던 나는 룸메에게 여러 불만사항을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외출할 때마다 그가 세네 번씩이나 펌핑하고 가끔 뚜껑까지 열어두고 나갔던 향수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너무 향수 냄새가 진해서 못살겠다고!


랑방 잔느를 뿌리면서 나는 결국 룸메와의 관계가 회복할 수 없는 서먹한 관계로 끝나버렸단 사실을 자꾸만 되살려야 했다. 그리고 향수를 갖고 싶었던 나의 유치한 욕망이 결국 이렇게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결말을 가져올 뿐이라는 게, 조금은 슬프고 안타까웠다. 향수로 대표되던 '로맨틱'에 대한 환상이 컸던 만큼, 그 환상이 무너지자 나 같은 사람은 결코 로맨틱한 순간을 선물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한없이 비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연애가 끝난 뒤에도 향수는 한참 동안 남아있었다. 왜 써도 써도 줄지 않는 건지... 안 그래도 진한 향기에 질식할 것 같았던 향수는 한동안 봉인돼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엔 돌연 '청승맞음'을 담당했다. 실연한 뒤, 하루 걸러 하루 눈물로 지새우다가 갑자기 향수가 생각난 것이다.  "이 향수를 다 뿌리면 나는 그때쯤이면 그를 잊을 수 있겠지?"라는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멘트를 입 밖에 꺼내면서, 나는 일부러 향수를 칠갑하며 뿌려댔다. 그때 내 룸메였던 동생은 두 귀를 채 막지 못하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동생에게 최악의 룸메였을 나는 최고로 지질한 향수의 기억을 남겨주었을 것이다.



그랬던 랑방 잔느... 나는 가을의 애수와 나에 대한 그리움을 뚝뚝 떨어뜨리는 후배의 문자를 받고 가만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마운데... 뜬금없이 웃음을 던져주는 기억을 몽게뭉게 던져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조금은 부끄럽고 유치한 기억이었다.


현관 앞 거울 앞에는 아직도 향수병이 가만히 놓여 있을까? 내 기억 속 랑방 잔느는 이제 더 이상 지나간 옛 룸메를 떠올리지도, 지나간 옛 연인을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보라색 커다란 사각의 향수병이었다. 버리지 못할 만큼 쓸쓸한 잔량으로 남아있던 향수는 가느다란 펌핑 빨대가 보일 듯 말 듯, 보라색 짙은 리본이 자꾸만 뚜껑에서 빠지곤 하던 그런 자잘한 잔상을 더해주곤 한다. 가끔 그 향수 버리라고 말하던 동생은 정말로 그걸 버렸을까?


그런데,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왜 하필이면 나는 랑방 잔느를 후배에게 선물해줬는지 모르겠다. 무진장 기억을 더듬으며 애쓴 끝에, 후배가 나에게 "선배 향수 냄새 좋아요"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을이라서 내가 준 향수를 뿌렸다는 후배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지만 덕분에 새록새록 진한 향수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었다. 후배에게 고맙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 것이지만, 사실 나는 랑방 잔느 향기가 좋았다. 가끔 진심으로 뿌리고 싶은 날이 더 많았다. 이제 와서 향수, 너에게 하는 얘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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