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겨울왕국, 비쉬켁

겨울은 나의 모든 내일이 되었다.

by 별별
이곳엔 일주일 전부터 눈이 내렸다.

처음 눈이 내렸을 때 '아직 11월이니까 하루 반짝 춥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눈이 조금 녹을라치면 부리나케 또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조금씩 눈이 내리던 것이 일주일 째다.




눈이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늦가을과 다를 바 없었던 이곳은, 눈이 내리자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치지 않고 내리던 눈 덕분에 모든 풍경은 하얗게 변했다. 온통 사물과 풍경의 색이 사라지고 세상은 흰 도화지로 돌변했다. 나는 갑작스레 어제와 확 달라진 하이얀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그래도 낯선 이곳이 한층 더 낯설어지는 느낌이었다.


눈 내리던 둘째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특히 안개가 심했다. 하늘과 땅의 경계조차 불분명해졌다. 눈이 쌓여 덩달아 그림자가 된 사물이 아니고서야, 배경은 오로지 흰 눈과 안개 뿐이었다.


눈 내리는 풍경이 참 막막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여러 사정이 쌓이던 시점이었다. 이곳에 온지 이 주가 다 되어갔지만 언어가 되지 않아 일상은 불가능했다. 불편함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특히 교통편을 이용할 때 안내방송이 없는 버스는 물론이고 택시조차 탈 엄두가 안 났다. 걸어다니면서 지리를 익히고 싶었지만 눈 때문에 어디 밖을 함부로 나다닐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본의아니게 며칠 째 집 안에 틀어박히다보니, '나는 갇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끊이지 않고 내리던 눈... 놀라운 환경을 만들었다.


눈을 직접 온 몸으로 맞은 건 바로 나무들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눈이 소복히 내려앉던 나뭇가지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갑자기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쌓이는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나무들이 도로 이곳저곳에서 보이곤 했다.


세상에, 길을 가면서 가로수가 무너질까 걱정해야 하다니.

그런가하면, 고드름도 참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고드름은 차 범퍼 밑에서나 가끔 달려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은 고드름이 이곳저곳 주렁주렁 맺혔다. 건물보다는 지붕이 있는 집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말이 좋아 고드름이지, 무시무시하게 늘어난 그것들을 보노라면 얼음칼 내지 두꺼운 얼음바늘이 촘촘히 박혀있는 느낌이었다. 저게 떨어지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세상에2, 길을 걷다가 고드름이 떨어질까 걱정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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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눈은 예뻤다


눈 때문에 이곳 풍경이 사뭇 막막하고 답답한 환경으로 변모했지만, 그래도 눈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아침에 나설 때마다 사진을 찍곤 했으니까.


늦가을 나뭇가지들이 뒤죽박죽으로 온 하늘을 수놓을 땐, 참으로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눈이 내리자 텅 빈 가지들이 눈으로 촘촘하게 두터워지는 것이었다. 눈이 음영을 만들어내고 나무는 그림자가 된 것만 같아, 나무들이 입체감있게 변모한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이 생기있게 살아났다. 마치 원래부터 눈을 기다렸던 것처럼.



눈이 내린 뒤부터 매일 아침 나설 때마다 눈이 부시다. 차도를 나가면 눈이 녹아 까맣지만 거리가 온통 하얀 곳에서는 흰색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산에서처럼 선글라스를 써야 하나 고민했지만 (주변사람들이 아무도 선글라스를 쓰는 사람이 없어) 그건 좀 오바하는 것 같다.


내일도 눈이 내리겠지.


이젠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일상적인 이곳의 눈 내리는 풍경. 눈 내린지 며칠이 되었다고, 아니 나는 벌써 가을을 포기하려 한단 말인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 때...


하지만 11월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을이라는 건 우리의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이곳의 가을은 '눈 내리기 직전'까지였다. '눈이 내린 직후' 바로 지금, 이곳 비쉬켁에서는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겸허히 이곳의 계절을 수용해야만 한다.


겨울이라고해서 나쁠 건 없다. 사람은 계절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장갑을 꺼내고 더 두꺼운 옷을 꺼내입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모자를 샀다. 그러고보니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두툼한 옷으로 무장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변하고 그 변화는 곧 적응이다. 눈은 순식간에 풍경과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켰다. 어쩌면 가장 선명하게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였던 것이다.


비쉬켁에서 맞는 두 번째 계절, 겨울. 갑작스런 변화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제 눈이 익숙해진, 눈이 전부인 세상이다.


그렇게 겨울은
나의 모든 내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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