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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Apr 14. 2019

시골에서 도시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어느새 그리워했던 나의 도시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가로등 하나 없이 오직 석탄 때는 연기만 피어오르는 그곳의 밤은 그야말로 ‘캄캄’했다. 감히 혼자 밖을 나다닐 생각조차 못했으며 어쩌다 함께 밤늦게 다닐 때에는 휴대폰으로 불빛을 비추면서 울퉁불퉁한 땅에 굴러다니는 돌부리를 조심해야 했다. 개들도 숨죽이고 오직 잠들기만을 기다리는 곳, 그곳의 밤은 오로지 내일을 위한 밤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한 시골 마을. 그 나라에서는 도시였다지만 우리나라의 '읍'만 한 곳이다. 한국에서 중간 경유지를 거쳐 9시간 걸려 도착한 뒤, 수도에서 다시 차를 타고 3천 미터 고산을 두 개나 넘고 꼬박 6시간이 걸려서야 내가 사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왜 그곳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막연히 동경했던 미개발지역, 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다는 내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처음엔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광활한 초원과 만년설을 마주해 보면 자연의 거대한 풍경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걸어 다니는 것보단 말을 타고 달려야만 이 땅을 밟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일 가축의 똥이 굴러다니는 흙길을 걸으면서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인간의 몸으로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바람이 불면 모래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비가 오면 질척거리는 물웅덩이를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난 평생 그곳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가스보일러 난방이 되며 안전한 콘크리트 마감의 아파트에 산다는 전제 하였다.


그곳의 사람들은 매일 석탄을 나르고 기름을 나르고 어떤 곳은 물을 긷고 전기가 끊길 때를 대비해 항상 초를 곁에 두고 살았다. 몇 년에 걸쳐 집 짓기와 페인트칠을 직접 하고 수확철이 되면 아이들은 학교를 빼먹고 가족들이 모두 감자를 캐러 갔다. 도시가 아닌 곳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존’이었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았다.       



점점 더 도시가 그리워졌다. 내가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은 그냥 아무거나 시켜서 이튿날 받아볼 수 있는 택배였다. 작은 아이섀도 콤팩트를 시켜도 박스째 충전재를 가득 채워 오기도 했던 그 과대포장을 이젠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와 흥정하는 대로 가격이 천차만별인 택시, 사람이 다 차면 그제야 출발하는 시외버스 천지였다.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그 흔한 카페가 없는 것도 고역이었다. 술집이라고는 딱 하나 있었는데 단체로 놀러 갔다가 정전이 되는 바람에 한 시간도 안 돼 그만 쫓겨 나오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수도에 갈 때면 고래가 물 밖으로 나와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하루 이틀 머무르는 데에 한 달 치 평소 생활비를 ‘탕진’하고 왔다. 오랫동안 못 먹었던 한국음식, 피자나 스테이크를 먹었고 가끔 일본, 태국 음식점에도 갔다. 옷가지 몇 개와 냄비, 커피 원두, 한국 식재료를 샀을 뿐이다. 평소에 너무 돈 쓸 일이 없었던 게 탕진으로 여겨진 이유였다. 다시 마을에 돌아오면 구멍가게에서 낱개로 파는 달걀을 사서 돌아오면서 쪼그라든 풍선처럼 허구한 날 길에 돌아다니는 양 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고향이 지방이었던 나는 대학을 올라오면서부터 서울에 살기 시작했다. 대학로가 주된 터전이었고 그곳을 기점으로 지하철 노선도가 마르고 닳도록 펼쳤다 접으면서 서울 곳곳을 다녔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끼리 명동, 신촌, 홍대입구, 건대입구, 잠실 등 그 당시 유명했던 시내란 시내는 다 헤집고 다녔다. 취미가 ‘서울구경’인 셈이었다. 그런 우리들을 서울 사는 친구들은 신기한 듯 바라봤고 우리는 어떻게 우리보다 더 서울을 모르냐며 핀잔을 줬다. 원래 지방 사람이 서울을 더 잘 아는 법이다.      


운 좋게 첫 직장을 서울 중심부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곳에서 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 회사의 가장 좋은 복지가 바로 위치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점심시간이면 각종 잡지에서 유명하다고 소개하는 30년, 50년 된 종로나 을지로 맛집에서 흔하디 흔한 점심을 먹고, 때론 서촌이나 삼청동에 가기도 했고 택시를 타고 남산터널을 넘어 이태원에 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혼자 점심시간을 보낼 땐 명동에 있는 백화점에서 잠깐 화장품을 사러 가거나 옷을 바꾸러 가기도 했다. 매일 주변엔 새로운 곳들이 넘쳐났고 현란한 광고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그건 너무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들이었다. 회식으로 근사한 와인바에 가고 회사 앞 고급 헬스장에서 헬스를 하면서도 사실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다.     


“난 서울에 정이 안 가.” 심지어 난 평소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던 터였다.




그렇게 10년을 서울에 살았던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몇 년 만에 지하철역에 내렸다. 지하철 앱 없이 최단 환승구역도 몰라서 한참을 걷다가 마침내 다른 지하철로 환승하고 겨우겨우 내렸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온 출구는 또 잘못 찾아 나온 것이라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빌딩들이 나를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는 대기하고 있는 차들의 시선 속에 런웨이를 걷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해후한 전 직장 동기들 예닐곱 명과 비스트로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옛날에 내가 모임 장소로 소개해 데려갔던 곳이다. 이젠 꽤나 낯설게 느껴졌지만 익숙한 것처럼 와인 한 잔을 시켰다. 우리는 감바스와 치즈 세트를 먹고 다들 와인 한 잔 씩을 더 했다. 어느덧 열 시가 넘었고 우리는 2차를 떠났다. 단골 맥주집으로 가서 한 차례 더 시끌벅적하게 이야기했다.


막차 시간이 다 되자 그곳을 나섰고 일부로 을지로에서 시청까지 좀 걸어서 왔다. 도로 가까이서 들리는 버스와 자동차 배기음, 주변 시내 곳곳을 맴도는 가게 불빛과 회식의 여운...... 넓은 시청광장에는 우리처럼 아직도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기들과 살짝 물오른 기운으로 다음을 기약했다.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런 여유, 이런 들뜬 느낌.      


집에 가는 길엔 빌딩들이 높은 빌딩과 호텔들이 까만 어둠 속에 따뜻한 불빛을 빛내고 있었다.  쌀쌀한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달리는 차들 옆에서 걸어가는 게 좋았다. 도시의 밤하늘, 도로를 메운 자동차의 붉은 라이트, 빌딩 곳곳에 하얀 불빛들. 찬란한 색감의 도시 필터를 씌운 풍경을 오래도록 감상했다.


 산책. 아마도 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도시의 밤 산책이었나 보다. 익숙한 사람들과의 기억을 꼭 품에 안고 낯선 사람, 낯선 공기에 동화되는 또 다른 포근한 느낌. 길고 긴 시간을 돌아, 비로소 도시에 안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시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다.



형형색색 멋모르고 환한 불빛, 수많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차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뿜는 매연까지도 좋았다. 칠흑같은 어둠이 아닌, 두려움에 떨며 걷는 것이 아닌, 오롯이 여유롭게 주변을 신경쓰지 않고 거닐 수 있는 여유는 밤 산책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됐다. 그리고 도시는 걷고 산책함으로써 오롯이 나의 밤이 된다. 내가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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