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공감_엄마의 다이어리
D-day의 새벽이 밝았다. 5시 알람이 울리자마자 마음이 급해 세수도 생략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전복죽부터 불에 올리고 눌어붙지 않게 젓는 동시에 다른 반찬을 만들어서 통에 담았다. 지난 며칠 도시락 싸기를 연습한 덕분인지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도시락 준비가 끝난 후 딸을 깨우고 나도 고양이 세수를 했다. 딸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밤새 화장실 출입도 안 하고 별다른 기척이 없었던 걸 보면 잠을 설치진 않은 것 같았다. 만사태평한 딸 때문에 고3 내내 조바심을 쳤는데 막상 큰일을 앞두고 느긋한 성격이 보탬이 되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수능 고사장은 집에서 9km 정도 떨어진 한 여고였다. 전날 시험 삼아 다녀왔을 때 25분이 채 안 걸렸지만 당일엔 여유 있게 입실 1시간 전인 7시 10분에 출발했다. 학교 인근에 다다르니 이미 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차하면 내가 내려서 딸의 손을 잡고 뛰겠다고 했다. 막혀도 차가 빠르지 않겠냐, 엄마랑 뛰면 더 늦는다며, 시간도 충분한데 괜히 긴장감 조성하지 말라고 남편과 딸이 동시에 타박했다.
시험장 입구까지는 차가 못 들어가서 학생과 학부모들로 북적거리는 길을 50m 정도 걸어갔다. 인생의 임계점을 맞은 딸을 위해 뭔가 멋진 말을 건네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갑자기 딸이 내가 들고 있던 도시락 가방을 휙 낚아채더니 인사도 없이 정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딸의 뒤통수에 대고 “끝나고 여기서 만나”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격려의 말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딸은 운동장의 게시판 앞에 서서 시험장 위치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이내 건물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나는 이번 주 내내 수능 준비를 한답시고 부산을 떨었지만 심적으론 큰 동요가 없어서 ‘나 수험생 엄마 맞냐?' 하면서 여유를 부렸더랬다. 그런데 딸이 들어간 건물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그만 왈칵,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쏟아내고 말았다.
'내가 자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 그냥 여기 서서 담 너머로 바라볼 뿐,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무리 뜨거워도 담장 안으로 함께 들어갈 수는 없다'는 단호하고 엄중한 인생의 진리를 비로소 그 순간 체감했다.
집에 돌아와서 딸의 방을 치우다가 책상 위에서 ‘쫄지 말자’라고 흘려 쓴 메모지를 발견했다. 그걸 보는 순간, '쟤는 고3인데도 참 태평하다'라고 속없는 소리를 한 내 입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도 딸은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도 안 떨렸다”며 씩씩한 모습으로 나왔다. 나도 눈물까지 쏟았던 애틋한 마음은 감추고, “대박이냐 쪽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하며 농담을 던졌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참 공평하다. 손꼽아 기다리는 소풍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더디 오길 바란 수능날도 어느새 과거가 됐다. 집안 곳곳에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쌓여있는 수능 선물들, 찹쌀떡·마카롱·초콜릿을 다 먹을 때쯤이면 시험의 결과가 나올 텐데.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달콤한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마카롱 박스를 하나 뜯는다. '앗싸~ 내가 좋아하는 뚱 마카롱이닷!'
위 내용은 딸이 고3 때 치른 첫 번째 수능 소회를 담은 글입니다.
당시 제가 일하는 교육 주간지의 칼럼 코너에 기고했던 글을 조금 수정해서 올려봤습니다.
딸은 오늘 세 번째 수능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저는 오늘 6시 반에 일어났는데도 전복죽, 불고기 떡볶음, 김치 볶음, 계란말이, 김자반, 딸기, 따끈한 매실차로 구성된 수능 도시락을 거뜬히 쌌고, 집에서 5킬로미터 거리의 시험장에 데려다줬는데 차에서 내리지는 않고 딸만 시험장 입구에 내려주고 왔습니다.
앞차에서 내린 수험생은(어려 보이는 걸 보니 아마도 첫 번째 수능인 듯) 부모님에게 꾸벅 배꼽 인사를 하고 들어가더군요. 일관성 있는 우리 딸은 올해도 인사도 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 들어갔고요.
무심한 엄마는,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우리 딸은, 여린 속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눈을 맞추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런다는 걸요. 오늘도 똑같이, 딸의 뒤통수에 대고, '이따가 여기서 만나'라고만 했습니다.
차가 출발한 후에도 저는 목을 거의 180도 가까이 돌려서 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어요. 하지만 올해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습니다. 애잔한 마음은 여전했지만요.
두 번째 수능 이야기는 건너뛰었지만 그건, 한 페이지에 차마 다 담을 수 없는 지난하고 아픈 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카롱만큼이나 달콤하길 기대했지만 다크 초콜릿보다도 더 쌉쌀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죠. 딸도, 저도,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년까지는 안달복달했는데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합니다.
담장 너머로 지켜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대신해줄 수 없는 수능 시험, 그 결과 역시 온전히 딸의 인생에 속한 것이라는 인생의 엄중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설령 더 나은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도전의 과정에서 얻은 고통과 인내 그리고 노력이, 딸의 인생에 풍요로운 열매로 맺힐 거라고 믿습니다.
P.S.
올해는,,, 선물이 전부 카카오 쿠폰이라서 아쉽게도 제가 좋아하는 마카롱 구경을 못했습니다. ㅎ(철없다!!)
수능 선물을 3년 연속 주신 일관성 있는 분들에게 결과와 무관하게 나중에 밥을 한 번 사려고 합니다.
그리고, 재수도 한 번 안 해 본 엄마는 앞으로 삼수한 딸에게 인생 훈수를 두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