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유목민들의 오아시스

커버 사진 @ 프랑스 케브랑리 박물관 도서관

by 구디너프

도서관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그 위대한 가치가 나에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글을 쓰고 번역을 하는 프리랜서인 남편이 내 출근길에 따라나선다는 점에서 그렇다. 피곤한 날 운전을 대신해주고, 직장에서 일어나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건에 대해 마음 놓고 남편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은 좋으나, 내 일터에 아는 얼굴, 그것도 남편이 돌아다닌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쾌할 수 없다. 공적인 공간을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느낌이랄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본인이 도서관에 가는 것은 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도서관의 이용자로 방문하는 것이며, 다만 우리는 차편을 공유하는 일종의 카풀 같은 관계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그 말도 틀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직주근접을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도서관 코앞에 살고 싶지는 않다. 걷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또는 운전하면서, 일로의 워밍업 또는 일로부터의 쿨다운에 들어가는 데, 출퇴근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어 일과 개인 생활의 분리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일터인 나와는 달리, 도서관이 놀이터인 남편에게 도서관은 가까울수록 좋다. 한때 남편이 광인처럼 글을 쓰던 시기에 남편은 국립중앙도서관이 가깝다는 이유로, 나도 좋고, 본인도 좋은 일 아니겠냐며, 집을 서래마을로 옮기고 싶어 했다. 돈이 충분했다면 실행에 옮겼겠지만 남편에게는 아쉽게도, 나에게는 다행히도 이사는 하지 못했다.


내가 충청의 교육 도시인 어느 지방의 대학도서관으로 잠시 일터를 옮긴 후 남편의 도서관 애착은 더 강해졌다. 이십 년 동안 남편을 옆에서 지켜봐 온 나는 남편이 이 공간에 기뻐하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 공공도서관의 북적거림을 견뎌내지 못하는 이 남자는 적당한 수의 사람들만 활동하는 쾌적한 환경에서, 이들이 학습에 몰두하며 만들어내는 백색소음을 들으며, 자신만의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그뿐이랴. 점심시간이면 학생식당으로 가 가성비 좋은 만찬을 즐길 수 있으니 책을 좋아하는 남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일터는 없는 셈이다.(프리랜서에겐 책과 노트북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일터가 된다.)


남편이 내 일터에 있건 없건 내가 일하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같은 건물에 있으나 찾아가거나 연락을 하지도 않기에 동선이 겹쳐 우연히 마주치지 않는다면 퇴근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나 남편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나는 남편의 일과를 주로 인스타그램으로 확인한다. 주로 자신이 읽은 책의 사진을 올리지만 어떤 날은 비 내리는 유리창을, 해 질 녘 풍경을, 단풍이 곱게 든 가을 풍경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자료실 풍경에 신나는 휘파람 음악을 입힌 영상이 올라왔다. ‘아침 9시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길’이라는 제목의 릴스였다. 순간 직감했다. 이 남자에게 새로운 사랑이 생겼음을.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은 진리였던가. 영상에는 ‘너무 좋네요’, ‘저도 도서관으로 출근하고 싶어요’ 같은 댓글이 무수히(는 아니고 십여 개) 달렸다.


대학도서관으로 출근하고 싶은 프리랜서들이 혹시 있다면, 당신이 사는 곳 주변에 지역사회에 개방을 하고 있는 대학도서관이 있는지 찾아볼 것을 권한다. 원래 대학도서관은 대학의 교육, 학습,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학생, 교수, 교직원 등 대학 구성원에게만 열려 있는 공간이지만, 국공립대학 등 일부 대학은 지역주민에게 도서관을 개방하기도 한다.


특히 내가 일하게 된 이 도서관은 개방의 범위가 어느 곳보다도 넓다. 출입 게이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출입카드 발급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원하는 자료실로 가 읽고 싶은 책을 얼마든지 열람할 수 있으며(대출을 하려면 연간회비를 내야 한다. 그러나 열람은 천 권을 봐도 무료!), 주기적으로 열리는 저자와의 만남과 같은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다. 도서관의 자료와 시설과 서비스를 대학 구성원과 지역주민 모두에게 거의 차별 없이 제공하는 이곳이야 말로, 지적 유목민인 프리랜서들에겐 진짜 오아시스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