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광고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
https://brunch.co.kr/@bicco/20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다.
건국 초기부터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교 사상이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고, 이를 가능하게 한 핵심 시스템이 바로 과거 시험이었다.
과거 시험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었고, 문과의 경우 최종 합격자는 대과 33명, 소과 100명으로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수만 명이 응시하는 시험에서 33명만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초고난도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을 완벽하게 숙지해야 했다.
조선시대 양반 자제들에게 사서삼경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유교 경전에 흥미가 없어도, 다른 학문을 배우고 싶어도, 출세를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책들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시작해 성균관에 이르기까지, 양반들은 똑같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저 소리만 따라 했지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문장이 입에 붙고, 그 의미가 마음속에 새겨졌다.
논어의 첫 문장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문장을 수백 번 읽다 보면, 결국 그 가치관이 자신의 사고방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었다.
회피할 수 없는 반복적 노출을 통해, 유교적 세계관이 조선 지식인들의 DNA에 각인되는 과정이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 했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했지만, 그 결과 조선 양반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완벽하게 내면화했고, 이는 500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TV 광고가 효과를 내는 원리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앞에서는 디지털 광고의 성과 측정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디지털 광고는 노출과 클릭 등 기본적인 지표부터 유입된 고객의 전환이나 매출 발생까지 추적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어서 비교적 정확한 성과 측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ATL이라고 불리는 4대 매체(TV, 신문, 라디오, 잡지)는 투입된 비용 대비 어떠한 성과가 일어났는지 100%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광고를 보고 바로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 뿐더러, 심지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측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TV 광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주요 채널은 비싼 광고비를 받고 있다. 성과를 제대로 측정하기 힘듦에도 광고 하면 당연히 TV 광고부터 생각하는 것은, TV 광고의 성과(효과)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TV 광고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특징은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해당 시간에 광고를 보는 사람은 TV를 끄거나 다른 채널로 돌리지 않는 한 그 광고를 강제로 봐야 한다.
이 부분은 초기 인지도나 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의 뇌는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떠드는 전화 통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더 잘 들리고 더럽거나 끔찍한 영화의 장면은 (떠올리기 싫지만) 더 잘 생각난다.
광고도 마찬가지다. 광고 자체에 재미를 가지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프로그램 사이에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틀어놓는다. 보기 싫어도 보게 되고 듣기 싫어도 듣지만 기억에 남는다.
케이블 채널에서 주로 나오는 인포머셜(정보 중심으로 길게 알려주는 광고, 보험 가입 광고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을 제외하고 TV 광고는 15초 길이로 규격화되어 있다.
가끔 30초 길이로 제작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매체비는 2배가 되는 거고 15초 두 편을 만드는 것이 더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에 30초 광고는 자주 쓰지 않는다.
15초라는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어떤 메시지를 소비자에게 전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만, 반대로 기억에 남게 만들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어서 마케터들은 이 15초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기억에 남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15초짜리 TV 광고는 보통 3번 정도 보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물론 어떤 광고는 너무 잘 만들어서 1번만 봐도 기억에 남을 것이고, 어떤 광고는 10번을 봐도 기억에 남지 않겠지만.
노출 횟수(frequency)는 보통 3번 이상의 노출을 기대하고 매체 계획을 수립하고, 10번 정도까지도 괜찮다고 보는 편이다.
3번 이하의 1인당 노출이 기대되고, 예산이 부족하다면 과감히 TV 광고는 매체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것을 추천한다.
노출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준이라면, 시청률은 말 그대로 특정 프로그램을 해당 송출 시간에 몇 %가 보고 있는지를 말하는 지표이다.
이를 통해 총 노출량(GRPs, Gross Rating Points)이라는 기본적인 TV 광고의 매체 성과 지표를 추정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광고 송출 시간이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8시이고 해당 시간의 시청률이 각각 10%라면 GRPs는 30이 된다.
마케터와 매체 기획자는 한정된 예산에서 최적의 성과를 내기 위해 GRPs와 시청률 획득 비용(CPRP, Cost Per Rating Point)을 감안한 광고 송출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당연히 시청률이 높겠지만 광고 단가도 비쌀 것이다.
반대로 인기가 없는 프로그램은 시청률은 낮지만 광고 단가가 싸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CPRP가 비쌀 것이고, 인기 없는 프로그램은 CPRP가 싸다.
그럼 CPRP가 싼 프로그램에만 노출하는 것이 같은 GRPs 측면에선 무조건 유리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연히 CPRP가 낮은 프로그램에 광고를 집행하는 것이 비용 효율적으로 GRPs(총 노출량)를 높이는 데 유리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는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마케팅 캠페인이 성과를 내려면 정확한 타겟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광고비가 싸다고 주로 노년층이 보는 새벽 시간대에 젊은이들이 찾는 뷰티 제품 광고를 하지는 않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즉, CPRP가 높다는 것은 해당 프로그램의 시청률 대비 광고 단가가 비싸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그 프로그램이 특정 광고주에게 매우 중요한 타겟 시청자를 대규모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마케터는 타겟 시청률(TRP, Target Rating Point)을 기준으로 효율을 검토하게 된다.
만약 20~30대 여성 타겟의 화장품 광고라면, 전체 시청률은 낮지만 20~30대 여성 시청률(TRP)이 매우 높은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이, 전체 시청률은 높지만 주 시청층이 50대 남성인 뉴스 프로그램보다 훨씬 타겟 효율(TRP/Cost)이 높을 것이다.
또 결국 CPRP가 아무리 낮아도 타겟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노출된다면 그 예산은 낭비되는 것이다.
높은 CPRP를 지불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고객에게만 집중적으로 노출하여 광고비 낭비를 줄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단순히 비용만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광고가 노출되는 프로그램의 내용과 맥락(Context)은 광고 메시지의 수용도와 영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간접광고(PPL)를 생각하면 쉽다.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에 높은 몰입도를 가지고 시청할 때 노출되는 광고는 단순히 배경으로 흘러가는 광고보다 메시지 전달 효과가 뛰어나다.
이런 인기 프로그램은 자연스럽게 높은 CPRP를 형성한다.
또 프로그램의 주제와 광고하려는 제품의 이미지가 일치하면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신뢰도가 높은 다큐멘터리에 노출되는 금융 광고는, 오락 프로그램에 노출되는 것보다 브랜드 신뢰도 측면에서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일부 인기 프로그램은 광고주에게 노출 기회 자체가 제한적이거나, 높은 화제성으로 인해 높은 CPRP를 감수하고라도 집행하기도 한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월드컵, 올림픽, 슈퍼볼과 같은)나 국민적 관심을 끄는 인기 드라마의 경우,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광고를 집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브랜드 이미지에 프리미엄을 더해준다.
화제성이 높은 프로그램은 광고가 노출된 후 온라인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재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단순히 TV 시청자에게만 노출되는 것을 넘어 매스미디어의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케터는 단순히 '싸게' GRPs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타겟에게 가장 효과적인 환경에서' GRPs를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비싸더라도 타겟 효율이 높은 프로그램에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래도 마케팅 예산은 한정적인데, 내보내고 싶은 광고의 적정 GRPs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한 달 집행 기준으로 최소치는 200GRPs 정도이다. 광고가 '실제로 방송되었다'는 수준.
초기 인지도를 쌓거나, 이미 인지도가 매우 높은 브랜드가 간간이 노출을 유지하는 정도에 적합하다. 300~500GRPs 정도는 되어야 광고 메시지가 타겟에게 충분히 각인되기 시작하는 수준이 된다.
대부분의 신규 캠페인이나 경쟁적인 상황에서 목표로 삼는 범위이기도 하다. 이 수준은 적절한 도달률(Reach)과 최소 유효 빈도(Frequency)를 확보하는 데 그나마 의미가 있다.
600~700GRPs는 시장 지배적인 노출을 목표로 한다.
경쟁사보다 훨씬 강한 인상과 높은 빈도를 확보할 수 있지만, 이 이상은 광고비 낭비(포화 지점)나 과잉 노출로 인한 소비자 피로도가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
보통 단일 소재 캠페인의 경우 1,000~1,500 GRPs 수준을 2~4개월 운영하는 것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하며, 월 15억 정도를 써야 광고가 '보인다'고 느끼는 수준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는 CPRP(Cost Per Rating Point), 즉 GRP 1을 얻는 데 드는 비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TV 광고 이야기만 너무 길게 쓴 것 같다.
다음 편에서는 다른 ATL 매체와 BTL(오프라인 행사)에서의 성과 측정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