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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을 자꾸 보는 이유

75회 한능검 후기

by 초월김

3번째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이하 한능검)의 결과가 오늘 발표되었다.
한능검은 문제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어 미리 점수를 예상할 수 있는데, 이번에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능검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시험에서 일정 급수를 요구하거나 가산점을 부여하기 때문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막상 시험장에 가보면, 나처럼 단순히 역사에 관심이 있어 응시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하다

(물론 외모만으로 추측할 뿐이지만).


내가 한능검을 치르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하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실제로 재미있었다.


첫 시험에서는 78점을 받아 2급을 획득했다.

그 회차는 흔히 ‘물국사’라 불릴 정도로 합격률이 높았던 시험이었다.

그러나 한두 문제 차이로 1급에 오르지 못한 것이 아쉬워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이후 두 번째 시험에서 목표였던 1급(심화 80점 이상)을 획득했고,

세 번째 시험에서는 “90점을 넘어보자”는 마음으로 응시했다. 결과는 93점.

다행히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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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에는 올해 마지막 시험(76회 한능검) 원서접수가 있다.

아마 네 번째 응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응시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응시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1급을 취득했고, 현재로서는 점수나 급수가 실질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응시해야 할 이유 역시 뚜렷하다.

기왕 시작한 김에 ‘100점’이라는 완벽한 점수를 한 번쯤 받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설여지는 이유도 명확하다. 100점은 쉽지 않다. 단 한 문제도 틀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다 쓰고 나서도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 선택은 9월 19일, 76회 한능검 원서접수일 즈음 다시 기록해 보려 한다.



조선의 26대 임금 고종은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 특히 청나라의 힘을 자주 빌렸다.
1882년,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반발해 일으킨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1884년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 반발한 개화파의 갑신정변 역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진압했다.

이때 창덕궁에서는 청군과 일본군 간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청군 승리),

이를 계기로 청·일 양국은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이 조선에 파병할 때 서로 알리도록 규정했는데, 사실상 ‘자동 참전’ 조항과 다름없었다.


10년 뒤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다시 청군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군 역시 조선에 들어왔고, 결국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본격적인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이겼다면 괜찮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역사에 ‘if’는 없다. 가정이 붙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 된다.

게다가 설사 청나라가 승리했더라도, 밀려드는 외세의 간섭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렇다면 고종은 단순히 어리석어서 청군을 불러들였던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란을 진압하려면 군대가 필요했고, 당장 손을 내밀 수 있는 상대가 청나라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역사 공부를 깊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당시 조선 역사 속에는 ‘외세 개입’이라는 전례가 뚜렷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외세의 개입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 대가는 경제적·사회적 부담이라는 이름의 ‘영수증’으로 돌아오게 된다.

만약 유사한 역사가 있었다면, 고종 역시 청나라에 손을 내미는 결정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강조하지만, 역사에 if는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문장은 흔히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기록에서 직접적인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역사를 잊지 않고 배우며 되돌아봄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데 지혜를 얻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곧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중요한 ‘참고서’다.


나는 나라의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개인적인 결정을 할 때에도, 우리 선조들이 했던 선택과 그 결과를 역사 속에서 찾아보며 거울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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