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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안솔 Mar 26. 2023

원나잇을 제안받을 뻔하다

Y는 나의 일곱 번째 데이트 상대였다. 그는 바이올린을 전공했는데 이과생인 나와는 다른 분야의 사람이라 대화가 재밌을 거 같았다. 또 그가 유학한 곳 주변에서 내가 거주한 적이 있는 공통점도 있었다. 그는 음악을 해서인지 감수성이 풍부했고 다정한 문자를 보내는 걸 좋아했다. 며칠 문자를 주고받다 보니 이과생이 수용하기에 버거운 지점에 이르렀고 나는 그를 되도록 빨리 만나서 문자질을 종료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만난 적도 없는 나와 이미 연애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상상 속에 있는 그를 끄집어내서 현실을 보여줄 때였다. 


“Y야, 우리 주말에 볼래?”

“기대도 안 했는데 완벽한 타이밍이야. 그냥 다 완벽해.”


외모가 멋있는 사람이 아닌 걸 알고 있어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제발 자신감 있는 사람이길 기도했다. 아니면 목소리가 좋든지. 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진과 비슷해 보였지만 500ml 물통을 굳이 뒷주머니에 끼고 있어서인지 산적 같아 보였다. 그가 입을 열어 인사를 했다.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높고 얇은 목소리였다. 그는 긴장한 듯 두리번대며 내 눈을 잘 쳐다보지 못했다. 


솔직히 실망했다. 하지만 식사를 하러 이동하는 길에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친구의 매력을 발견해 보자’ 우리는 식당에 마주 앉았다. 그가 여분의 그릇이 필요했나 보다. 직원이 다른 테이블 주문받느라 여의치 않은 상황인데 그는 냅다 “여기요, 그릇 좀 갔다 주세요”라고 외쳐댔다. 직원은 듣지 못했고 Y는 허공에 대고 몇 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 후에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내가 계산을 했다. 그를 다시 만나지 않을 걸 직감으로 알았나 보다. 


우리는 ‘범죄 도시 2’를 보기로 했었는데 계획대로 영화를 봤다. 영화관에 오랜만에 가는 거라 신이 났다. 다행히 영화는 재밌었고 손석구 배우님은 멋있었다. 


‘영화까지 봤으니까 이제 집에 갈 수 있다!’ 너무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 친구를 그냥 보내면 분명히 데이트가 잘 됐다고 생각할 거고 연락이 올 거 같았다. 그리고 내가 답장이 없으면 영문도 모른 채 헤맬게 뻔히 보였다. 우리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게 나를 진심으로 대한 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잠깐 걷자고 했다. 


첫 데이트에서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확신은 못한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도를 알뿐. 상대의 감정은 그만 아는 것이고 나는 내 감정만 책임지면 되는 걸 알기에 섣불리 단순한 호의를 호감으로 넘겨짚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친구는 속이 훤히 다 보인다. 만나기 전부터 감정을 발전시켜 왔고 오늘 만남으로 감정에 확신을 가진 듯이 보였다. 


“Y야, 데이트 어땠어? 난 정말 재밌었어. 근데... 네가 남자로 느껴지지가 않아.”

“어?... 남자로 느껴지지 않아?... 왜 그러지... 왜 그러지...”

그는 ‘왜 그러지’만 반복하며 당혹스러워했다. 


우리는 역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도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를 만나면 좋겠어.”

“곧 만날 거야.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고 믿거든.”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한 말이었지만, 실은 나에게 한 말이었다. 


허탈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며 집으로 가는데 그가 할 말이 남았는지 문자를 보내왔다.

“아까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해서 나도 하는 건데, 나는 사실 오늘 너랑 손도 잡고 싶었고 키스도 하고 싶었고 자고 싶었어. 우리 산책할 때 내가 오늘 밤 같이 보내자고 했음 그랬을 거야? 아니면 키스는?”

그는 오늘 확실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아쉬운 게 분명했다. 나는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지만, 곧 답장을 했다.

“아니. 아까 안 물어봐 줘서 고마워. 네가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자로 안 느껴져서 안 했을 거야.”


그의 속마음은 나에게는 상당히 파격적인 고백이었다.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고 다만 그의 솔직함에 놀랐다. 요즘 남녀들의 데이트가 이런 건가? 감정 소모는 하고 싶지 않고 가볍게 만나서 성욕을 푸는 걸 요즘 데이트라고 하는 건가? 그 개방성 존중한다. 다만 인간으로서 나의 매력을 찾기보다 성적 대상으로만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친구가 참 못나 보인다. 그걸 눈 보고는 말도 못 하고 다 끝난 시점에 문자로 전한 방식도 참 못났다.  


그는 진짜 마지막 문자라면서 마음을 끝까지 전했다.  

“왠지 우리 다시 만날 거 같아. 그리고 네가 먼저 연락할 거 같아. 네가 연애를 너무 오래 안 해서 지금 못 느끼는 걸 수도 있거든. 오늘 기억할 거야. 그리고 기다릴게. 차단은 하지 마.”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는 그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때의 기억을 더듬기 전까지는 그의 생각이 난 적도 없었다. 그가 나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일주일 동안 다정한 문자로 공을 들인 걸 수도 있지만, 나는 그가 한 모든 말이 진심이라고 믿는다. 못난 사람인데, 나는 쓸데없이 그의 외로운 마음을 알 거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의 바람대로 그를 좋아해 주는 여자를 만났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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