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면 현타 오니까
S는 나의 네 번째 데이트 상대였다. 우리는 만나기까지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프로필 사진이었다. 그는 프로필에 어릴 적 사진 한 장과 아주 멀리서 풍경에 묻혀 형체만 보이는 사진 한 장을 올려 뒀다. 이 두 사진으로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됐다. 하지만 그는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이색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외모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와 연결됐다. 우리는 카톡으로 대화를 이어갔는데 카톡 프로필에도 그의 얼굴 사진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게 좀 이상했다.
그는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다며 장문의 프로필을 보내왔다. 그 내용은 살았던 동네, 출신학교, 가족관계, 혈액형, 성격유형, 직업 경험 등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는 과한 정보였다. 처음에는 ‘확실한 걸 좋아하나 보네’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도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보낸 장문의 프로필은 그가 받아보고 싶은 내 프로필의 예시였던 거였다.
충격받은 나는 다시는 그와 연락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대답 없는 나에게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왔다. 뭐가 잘못된 건지 정확히 알려주는 게 그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나는 솔직히 말했다.
“회사 면접 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조건 따져가면서 사람 만나고 싶지 않아. 우리 결이 다른 거 같아.”
그는 자기 입장을 설명했고, 나는 또 그의 변명이 이해가 돼서 두 번째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세 번째 고비는 너무 잦은 그의 문자였다. 우리는 2주 후 주말에 보기로 했는데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을 해왔다. 나는 원래 문자를 잘하는 사람이 아닌 데다가, 모르는 사람과 일상을 공유하는 게 조금 불편했다. 예의상 처음 3, 4일은 꼬박꼬박 답장을 했지만, 결국 현타가 왔다.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S야, 만나기 전부터 너무 친해지면 안 좋을 거 같아. 우리 만나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말까?”
“못 참아. 매일 연락할 거야!”
“음.. 참았다가 만나기 전날 문자 하나 줘.”
우리는 결국 만났다. 안 만나는 게 맞을 거 같긴 한데 약속을 한 이상 깰 수 없었고 베일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자기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며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 번호도 물어봤다. 카톡으로 연락하면 되는데 왜 휴대폰 번호가 필요하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만나기로 한 카페에 들어가서 그를 찾아보았다. 한 바퀴를 다 돌았는데도 내가 데이트할 남자로 보이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다시 한번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있는지 유심히 찾아봤다. 아, 저기에 혼자 앉아있는 남자가 한 명 있다. 내 데이트는 아니어야 하는 사람인데 혼자 앉아있는 사람은 그뿐이다. 도망가고 싶다.
그는 얼굴이 아주 길어서 콘도그처럼 생겼다. 나는 당황했다. 이성을 볼 때 외모를 전혀 안 본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나도 외모를 보는 사람이었다. 다만 남들보다 기준치가 낮을 뿐이었다. 대화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그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이 무겁다. 내가 이러려고 꽃단장하고 나왔나 싶어서 힘이 쭉 빠진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일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사진을 안 보여준 것도, 연락에 공을 들인 것도, 다정한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소개팅 나갈 때는 적어도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내 소중한 시간을 줄지 말지 정해야 한다는 걸 이제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