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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안솔 Mar 26. 2023

데이트 비용 회수하러 갑니다

얼마 전 직장인 커뮤니티에 소개팅 후 비용 정산에 대한 어느 남성의 글이 올라왔는데 기사화가 될 정도로 화제가 됐었다. 내용은 이러하다. 첫 만남에서 데이트 비용이 8만7천원 발생했는데 여성이 4만원을 결제했다. 이 남성의 주장은 똑같이 먹었으니까 비용을 정확하게 반씩 부담하는 것이 공평하고 따라서 상대에게 3500원을 돌려받고 싶다는 거였다.


남자 입장에서는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데이트 비용을 전부 내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다. 데이팅 앱에 나보다 몇 년 빨리 입문한 동네 친구가 해 준 얘긴데, 요즘 남자들은 밥값 내기 싫어서 보통 카페에서 만나자고 한단다. 이유인즉슨, 막상 만나서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데 함께 식사하는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것이다. 한 번은 친구가 카페에서 소개팅을 했는데 소개팅남은 이미 본인 커피를 사놓고 앉아 있었고 내 친구에게 마실 커피를 사 오라고 했단다. 커피 한 잔 사 줄 생각이 없는 남자와 친구는 예의상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눴고 그 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첫 데이트 비용은 누가 내야 할까? 나는 누가 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서 내가 식사 비용을 내기도 하고 내가 식사를 얻어먹었으면 디저트를 사거나 다음에 만나서 사는 식이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 데이트 비용을 얼추 비슷하게 쓰는 것 같다.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으면 같이 내자고 하기도 하는데 데이트에서 더치페이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먹은 거 정확하게 반씩 내자’하는 게 정 없이 느껴진다.


아마도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남자니까 당연히 내야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나에게 돈을 쓰면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신호로 해석한다. 그래서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맛있는 거 사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넙죽 받는다. 밥을 얻어먹었지만 실은 그의 마음을 받은 것이다. 사고가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공짜 밥을 먹으러 데이트를 나가지는 않을 거다.


T는 나의 열아홉 번째 데이트 상대였다. (T를 끝으로 나의 1년 데이팅 여정을 마무리했고 지금은 긴 휴식기에 있다. 참고로 나의 휴식기의 이유가 T 때문은 아니다) 그는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싶다며 한 브런치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곳이었는데, 문제는 대기가 너무 길었다. 우리는 인근 카페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이성적인 매력을 찾지는 못했다. 곤욕스러운 것은 대화가 지루했다. 딱 한 번 만날 정도의 인연인가 보다 여기며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 섰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먼저 도착해 있었고 나중에 도착한 그는 가방에서 뭔가를 (아마 지갑이었겠지?) 한참 찾으며 시간을 지체했다. 그가 계산하기를 기다리는 어색한 순간을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5만4천원이 나왔다.


“제가 대접하려고 했는데요, 더치 하실래요?”

“아니에요. 좋은데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제가 살게요.”


그의 진심을 오해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말 사줄 생각이었을 거다. 다만 나보다 계산대에 늦게 도착했고 지갑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며 하필 지갑은 가방 아주 깊은 곳에 있어서 계산할 기회를 놓친 거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나 또한 진심이었다. 맛집 탐방했다 치려고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내 돈 5만4천원이 계속 생각났다. 5만4천원이 큰돈이어서가 아니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그에게 쓰기에는 아까운 돈이었다. 내가 기꺼이 쓸 수 있는 돈의 크기가 사람에 따라 정해져 있다. 아마 그것이 상대를 향한 나의 마음의 크기겠지. 냉정하게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의 크기를 생각해 보니, 커피 한 잔 정도다.


왜 요즘 남자들이 카페에서 간단하게 소개팅하려는지 공감이 된다. 내 시간, 내 돈, 내 기대까지도 비용으로 환산하면 상대가 아주 마음에 들어야 멋진 식사를 대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소개팅에서 내 이상형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니, 적어도 대화가 즐거운 상대여야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내 돈 5만 4천 원이 너무 아까웠던 나는 그에게 저녁을 얻어먹어야 억울한 마음이 풀리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엄밀히 따지면, 그에게 내 소중한 시간을 더 주는 거라 현명한 선택이 아닌 걸 알지만, 나는 그의 두 번째 데이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가 이렇게 치졸한 사람이었던가? 적어도 사고가 똑바로 박힌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하다.


나는 그에게 예뻐 보이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와 만나기 전에 산책을 갔었는데 그 복장 그대로 화장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공짜 밥을 먹기 위해 데이트를 나갔다. (안다. 나 참 별로다) 그는 약속 장소에 40분 늦게 도착했다. 나는 애초에 기대가 없었던지라, 욕하면서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맛있어 보이는 애피타이저 두 개를 시켜서 먼저 먹고 있었다. 반쯤 먹었는데 그가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차가 너무 많이 막히더라고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네, 맛있게 먹을게요.”


나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가 집까지 바래다줬다. 추운 날 나를 밖에서 떨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차를 가지고 집을 나섰고 그날따라 차가 많이 막혀서 조금 늦었을 뿐이었다. 오는 길에 그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을지 나는 그의 진심을 안다. 하지만 그의 진심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간을 전혀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  그를 만나러 가 아니라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는 것, 그리고 그가 사준 저녁을 먹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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