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를 만난 건 화창한 봄이었다. 우리는 종로 3가 옆 앞에서 어색하게 만났다. A는 멋을 전혀 내지 않았고 옷도 아무거나 막 입고 나온듯했다. 나는 그의 꾸밈없음이 좋았다. 그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하루를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낸다고 했다. 백수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그가 오히려 자신감 있어 보였다. 허세 없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물었다.
“우리 다시 볼 수 있어요?”
그는 내일모레 3주간 여행을 간다고 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정중할 거절인가 잠시 생각했다. 그의 여행 일정은 거짓이 아니었고 우리는 그가 여행을 간 동안에도 종종 문자를 주고받으며 연락의 끈을 이어갔다.
그가 서울에 돌아온 날 오후에 우리는 두 번째 데이트를 했다. 그는 누구와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싶으며 당분간은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연애관에 조금 당황했지만, 크게 신경 쓰일 정도로 그에 대한 감정이 깊지는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내심 친해지면 그의 생각이 바뀔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것 같다.
우리는 문자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주말에 만나서 데이트하는 애매한 친구 사이가 됐다. 이 애매함은 물론 나의 기준이다. 나에게 있어 남녀관계는 친구와 연인 딱 두 부류인데, 우리가 하는 이것은 이 두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으니 말이다. 이게 썸이랑은 다른 게 썸은 연인이 되기 전 단계(라고 유튜브에서 배웠다)인데 우리는 목표하는 바가 연애가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데이트 그 자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분명히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 함께 전시회도 가고 산책도 하고 새로운 동네도 가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며 남들이 데이트라고 하는 것을 한다. 편견 없고 열린 사고로 세상을 보고 싶은 나는 처음에는 이 새로운 것에 적응해 보려고 했었다. 해보니 장단점이 확실히 있었다.
장점은 다른 이성과 데이트를 할 수 있다. 특히, 내 나이 또래에게 시간이 얼마나 귀한가. 죄책감 없이 여러 명 만나보면서 우리가 좋은 인연이 될지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 낭비 없고 합리적이다.
문제는 이것이 곧 단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이미 이성적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그가 나 말고 다른 이성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는 상상을 하는 내가 얼마나 멋이 없던지. 우리 관계가 애매해서 짜증이 났고, 그 와중에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니까 조심해야 했다.
내가 그의 이상형이라고, 나를 좋아한다고 하고선 사귀지는 않는 그. 확실한 건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는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그를 좋아하게 된 이후에 꾸준히 해왔다. 우선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연락을 자연스럽게 끊어보려고 며칠 후에 답장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몇 주째 안 만나기도 했다. 내가 밀어내면 그는 잘 기다렸다가 기가 막히게 내가 심심할 때쯤 연락을 해왔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므로 나는 나의 각오를 쉽게 잊고 그와 연락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도 사귀지 못하는 내 심정이 참 억울했다.
더 이상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었고 마음의 안녕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 그와 친구를 선언한 것이다. 그는 좋은 남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함께 있을 때 즐거웠고 늙어서도 연락할 수 있는 좋은 친구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실은 나의 기대와 달랐다. 나의 친구 선언 후 두 번 만나는 동안 둘 중 한 명이라도 감정이 있으면 친구 사이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우리는 둘 다 감정이 있으니 A의 자연스러운 터치를 내가 매번 정색하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의 정의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의 기준으로 우리는 애매한 사이가 아니라 이미 '친구' 사이였다.
친구조차도 될 수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A와 못 보게 되면 정말 힘들 거 같아서 현실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어영부영 애매한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추위가 한풀 꺾인 어느 휴일 대낮에 만났다. 나는 그에게 그만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일어섰다. “나 갈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애매한 친구 관계를 털어냈다.
그와 헤어지고 오는 길에 그의 연락처를 지웠다. 그와 나눴던 추억을 훔쳐볼까 봐 우리 카톡 방에서 나왔다. 그의 연락을 기다릴까 봐 카톡 차단도 했다. 그의 연락이 그리울 거고 좋은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느낄 거다. 미래의 나는 기어코 확실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과거의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앞으로 여전히 혼자여도 나에게 상처 주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속 외침. 그를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곁에 머물면 내가 계속 휘둘릴 거다. 그래서 나를 지키는 선택을 한다. 한편으로는 그에게서 벗어나서 기쁘다. 이제 그는 나의 문제가 아니므로. 이렇게 사귄 적 없는 그와 이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