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나는 그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 그날, 우산은 내가 들고 있었다. (4장)

by 이도화

그때의 나는 이미 혼자 서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일을 하고 있었고,
내 생활을 감당하고 있었으며,
하루의 리듬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며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기댈 마음은 크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굳이 피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여동생이 한 사람을 이야기했다.
동생은 당시 화학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는 동생 회사의 거래처 사람이었다.


“언니랑 성향이 너무 비슷한데,
좀 재수 없어.
한번 만나볼래?”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서로의 삶이 전혀 다른 궤도에 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다.


처음 만난 곳은
덕수궁 돌담길 근처의
‘쉘부르’라는 카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고,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
늦었다는 말을 건네자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는 사실보다
왔다는 순간을
먼저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그날의 공기는 조금 느렸고,
말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페를 나설 즈음에서야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하에 있던 우리는
밖의 날씨를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미리 우산을 준비해 왔고,
그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그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온기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크게 설레지도,
갑자기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였다.
그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 삶의 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의 첫인상은
큰 눈과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말수가 많지 않았고,
나를 알아내려 서두르지도 않았다.


나는 원래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인데,
그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도
굳이 그 틈을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고,
침묵이 길어져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함께 있어도
무언가를 증명하려 들지 않는 태도는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날 우리는
비 오는 길을 조금 더 걸었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가벼운 농담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 일정에 대해 묻지 않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서둘러 규정하지도 않았다.


그런 만남은
기억에 크게 남지 않는 대신,
지워지지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굳이 빨리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 만남이라고.


그게 당시의 나에게는
충분한 이유였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나는 그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그 전까지도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 관계를
한 걸음 더 내딛어도 되는지,
이 마음이 진짜인지,
아니면 잠시 스쳐간 감정인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었다.


그 사이 그는
재촉하지 않았고,
연락이 없다고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나를 붙잡았다.


부재로 밀어내지 않는 태도는
이상하게
신뢰에 가까웠다.


그는 오래 기다렸다는 티를 내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그 반응이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 사람과의 관계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것,
내 속도로 움직여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것을.


그렇게
다음 만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 작가 노트

이 글은 제가 누군가를 만나며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던 순간을 기록한 글입니다.
설렘이나 강한 끌림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천천히 열어주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혼자 서는 삶에 익숙해져 있던 시기였기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도, 굳이 피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제 속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고, 기다림으로 제 마음에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우산 아래에서 시작된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안심’에 가까운 감정이었습니다. 이 장은 누군가가 내 삶에 들어오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관계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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